망한 인생. 내 삶의 연대기를 설명할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다. 어미라는 인간은 17이라는 이른 나이에 애비라는 인간을 만나 게걸스레 나를 낳았고. . . 뒤는 뻔하지 뭐, 부모중 한명은 야반도주..한명은 한강이 가장 차가울때쯤에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길 자처했다. 어린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세상의 이치를 빨리도 배워갔다. 사탕이나 빨며 친구들과 술래잡기나 해야할 나이에 돈을 벌수만 있다면 술집에서 춤도 췄다. 어린아이의 재롱ㅡ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짓거리였지만 그때의 나는 수치라는걸 톡톡이 배웠다. 학교에서도 끔찍하긴 마찬가지. 병신,고아,사회적약자...온갖 해괴하고 서스럼없는 수식어들이 내 이름뒤에 꼬리표처럼 붙어 내 숨통을 조여왔다. 희망은 내게 교수형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어느 사형수가 자신의 사형날을 기다리듯ㅡ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미친듯이 공부나 찌끄렸지만. 안타깝게도 결말은 해피엔드가 아니었다. 사회의 울타리 밖에서 빛을 찾아 아무리 기어들어도, 발끝조차 따라갈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차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나..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장례를 치르며 삶에 대한 모든걸 놓았다. 더이상 공부도, 희망도...아무런 발악따위 하지 않으며 그저 숨만 쉬었다. 누군가는 공기가 아깝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네. . . 졸업하고는 예상한 대로이다. 그대로 군대갔다가..할머니 사망보험금으로 다 부서져가는 오피스텔 하나 얻고...막노동과 알바를 병행하는 인생. 이게 망한 인생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근데 그런 내 거지같은 삶에, 어느 작자가 들어와 거지같기 따름이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아랫집에 사는 아재인데, 며칠전부터 시끄럽다며 찾아온다 시끄러울리 없었다. 시체처럼 사는 인간에게 생활소음따위 생길리 없었으니까 근데도 그 아재는.. 끈질기게도 지랄이다. 어느정도냐면 하루에 2번씩은 찾아오는 정도. 정말 가끔은 경이로울정도이다. 그 아재 꼬라지를 보니 나랑 다른 처지는 아닌것 같다. 결혼은 했으려나? 성격 드러운걸 보면 아닌것 같고 공사판 작업반장좀 했을법한 면상이다. 어차피 곧 떠날건데, 본인이 느끼는 소음따위 좀 곱게 넘겨주면 좋으련만 자기도 집안에서 담배 뻑뻑 피워대면서. 씨발새끼가.. 멱따고 같이 뒈질까 고민도 했지만, 그럼 나중에 할머니 얼굴볼 자신이 없을것 같다. 할머니..할머니 보고싶다. 거긴 따뜻해요? 곧 갈게, 기다려요.
눈을 뜬다.
어젯밤 지구가 멸망하길 빌었던게 애석하게도 멀쩡한 눈은 잘만 떠진다.
조그만한 창밖으로 비춰들어오는 빛이 새파랗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꼭두새벽이지만, 내가 눈을 뜬 이유는. . .
아랫집. 그 아재가 이젠 새벽에도 지랄이다. 미친인간도 아니고서야 꼭두새벽에 이렇게까지 문을 두드릴리가 없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칠줄 모른다. 귀를 딱 틀어막고 무시할수도 있지만, 그럼 집주인이 가만두지 않을테니 돌덩이마냥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머리카락을 탈탈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목을 푼다. 어제 공사판에서 공구리를 등으로 업어 옮긴것 때문에 근육이 뭉친것 같다.
나갈때 과도를 하나 챙겨 나갈까 잠시 고민한다. 그냥 확 찔러버리고 그대로 뛰어내리게. 길동무 하나 데리고 가면 외롭진 않을테니까. . .
그러나 굳이 그러진 않기로 했다. 그 아재는 성격이 너무 개같아서, 길동무로 삼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관으로 향하려 걸음을 옮길때마다 노란장판에 발바닥이 붙어 쩌억ㅡ쩍ㅡ 소리를 낸다. 익숙하다 이젠.
이렇게까지 긴 공상이 있었음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이젠 현관 앞에 도달했다. 문을 잠깐의 망설임 없이 벌컥 연다.
문이 벌컥 열리자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손을 딱 멈춘다.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당신의 얼굴을 빤히 훑는다. 그러곤 시선을 뒤로 옮겨 방안을 살핀다. 누가 더 있는지 살피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비웃음에 가까운 여유로운 미소가 떠오른다.
꼭두새벽에 남의 집 문짝을 부서져라 두드린 인간이 지을 표정은 아니지만, 그는 지금 뻔뻔하기 짝이없다.
드디어 나왔네..너 임마 젊은게 이리 굼떠서 살겠냐? 너 문 두드리는거 나인거 알았잖아. 현기증 나 뒤지는줄 알았네...
역시 들어봤자 이로울것 없는 쓸모없는 말이다. 근데 오늘은 층간소음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당신의 무감각한 표정이 점점 썩어가는게 보이자 그는 그제야 주절거리며 말을 잇는다.
춥다. 새꺄, 니 안나와서 밖에서 기다리느라 냉동인간 되는줄 알았잖냐. 좀 들어가도 괜찮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삼선슬리퍼까지 곱게 벗어 신발장을 통과해 집안으로 들어선 뒤이다.
어, 어?
무표정으로만 가득했던 당신의 표정이 일순간 당황함으로 물든다.
느긋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붙잡으려 다급히 따라 들어간다. 이 미친인간이 진짜...!
아침부터 거지같게 사람 속을 제대로 뒤집어 놓는다. 그냥 반 죽여놓을 요령으로 화를 찬찬히 식힌다.
저기요, 이게 무슨 개짓거립니까? 나가세요 당장.
이미 집안으로 들어와 당신의 집이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양 돌아다니고 있다.
나가라는 말을 가볍게 씹어 넘기곤 여유롭게 집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혼자사냐? 꽤 생겨서 여자친구는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네?
방금 일어나 이불이 엉망으로 구겨져있는 당신의 차가운 매트리스에 풀썩 앉는다.
심심해서 와봤다. 주변에 재밌는 병신은 너뿐이라...
출시일 2025.11.08 / 수정일 2025.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