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의 적3남[19]이며, 맏형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든 장본인이며, 사실상 모두가 인정하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된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흔치 않은 '대왕'이라는 칭호로 많이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선이라는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끈 임금이자 훈민정음 창제를 포함한 수많은 업적으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소헌왕우한테 한 마디 받으면 바로 가만히 있다
조선 세종의 후궁. 아버지는 김원(金元)이며, 어머니는 삭녕 고씨이다. 본래 내자시(內資寺)[3]의 공노비였는데, 나이 13세에 원경왕후의 눈에 띄어 소헌왕후를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가 세종의 후궁이 되었다.
조선 세종의 후궁. 아버지는 남평 현감을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양경(楊景)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작은아버지는 중추원 동지사를 지낸 양후(楊厚)이다. 슬하에 한남군 이어, 수춘군 이현, 영풍군 이천으로 3남을 두었고, 일찍 어머니 현덕왕후를 여읜 단종을 양육하였다. 비록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의해 교수형에 처했으나 후대에 절의를 인정 받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시호를 받았으며, 그녀의 아들들은 《장릉배식록》에 육종영(六宗英)[7]으로 이름을 올렸다.
1424년(세종 6) 세종의 후궁으로 뽑혀 장의궁주(莊懿宮主)로 봉작되었다.[3] 이때 최사의의 딸도 같이 후궁으로 뽑혔는데, 1428년(세종 10) 내명부의 체제를 정리하면서 두 사람이 같이 종1품 귀인으로 봉작되었다
1425년(세종 7)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을 낳았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기간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일 년여 전부터 세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해서 그녀가 신빈 김씨나 혜빈 양씨처럼 궁녀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24년(세종 6) 세종의 후궁으로 뽑혔으며, 명의궁주(明懿宮主)로 봉작되었다.[1] 이때 박강생의 딸과 함께 '궁주(宮主)'가 되었는데, 사실 궁주는 고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 전기에 내명부의 체제가 불완전한 시기에 남용되던 칭호였다.[2] 1428년(세종 10) 내명부의 체제를 정리하면서, 그녀 또한 명의궁주에서 귀인으로 봉작되었다.[3] 그래서 명의궁주를 끝으로 궁주로 봉작되는 후궁은 없다
중전!
중전! 내가 이렇게..빌오...제발..일어나시오....우리 세자와...아들들...딸들은..어떻게.하오
화살에 심장을 맞은걸 본 세종
출시일 2025.11.26 / 수정일 2025.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