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 맞은 조국은 왜 이리 탐욕스러운 건지, 남의 것을 훔치다 못해 제 조국의 살덩어리마저 아득바득 뜯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에는 차례가 있으며 그 누구도 카르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부사관의 말을 기억한다. 당연하게도 그 인간은 처참히 뒤졌다. 제가 말하는 카르마의 산물로서 삶을 다했으니 그닥 아쉬운 죽음은 아니었으나, 그자의 끝이 우리들의 끝과 다름없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죽음의 행군은 끊임없이 전진했다. 지난달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적군의 어린 소년병, 저번 주는 제 어미를 그리워하던 동갑내기 동포, 어제는 우리들에게 빵을 나눠 주던 동네 여인, 오늘은 제 혀를 씹어대며 저주를 퍼붓곤 절규하던 포로. 매일 밤마다 우리들의 창문을 두드려 내 죄를 알렸다. 그리고 그날 밤은 내 차례였다.
그 누가 애국심과 명예를 가볍게 입에 올리는가. 마치 자식이 부모를 우러러보듯, 죄인이 창살 너머 별을 바라보듯 조국을 떠받치고 가족을 뒤로하고 총칼을 들어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린 소년들을 찌르고 쏘는 이 모든 행위가 모두를 위한 대의라며 스스로를 속이곤 피비린내 나는 웅덩이에 몸을 담근다.
이름 없는 패잔병
내전에 참전했었으나 매복 공격 중 포로가 되어 8개월간 억류되었다. 이후 참혹한 고문의 여파로 인해 의가사 제대하여 신체적 및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정신착란 및 인격 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타인과의 소통에는 방어적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긁어내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쟁은 시체를 잉태한다. 이미 죽어버린 뇌를 찢어발기듯 그들은 내 살을 헤집고 가르고 뜯어가며 아무 말이라도 던져 보라는 듯 심폐소생술을 한다. 그렇게 죽어가는 내 몸속에서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난다. 내 뇌를 파먹고 자라는 존재들은 마치 나무가 가지를 치듯 주름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내가태어나고자라며행한모든일들에대해죄를묻는다 나는그저시킨대로했을뿐이고사실은매일밤잘때마다숨이멎어가던그들의눈동자를떠올리며그다음땅에묻힐사람은나라고사실은땅에묻히는것조차자비로운처사라는것을알고있음에도여전히죽음에저항하며삶을꿈꾼다만약내가태어난것이죄고내가행한모든죄들이나의뜻에서이루어진것이라면어째서조국은제게총과칼을쥐어주었나이까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시선을 방황한다. 아무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나를 찢어발길 칼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둘 의자도, 구역질 나는 약이 든 주사기도 링거도, 지랄 맞은 적군도 그 무엇도 없었다.
저 멀리서부터 불어와 내 눈가를 스치는 산들바람과 아직 녹지 않은 겨울의 향기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한 천장과 침대.
그리고 내 옆엔 네가 있었다.
나는 우물 깊숙히 내려다보며 외친다
거기 누구 있나요
수많은 울림과 목소리와 문장이 우물의 돌과 돌 사이로 부딪혀 파장해 내게 돌아온다. 마치 여러 파편으로 느껴지는 존재들은 본디 하나로부터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누가 먼저 알아챘을까 벌레처럼 내 머릿속을 갉아먹는 그 모든 허상의 유령들이 마치 나를 비웃듯 경박한 조소가 귓속에서 울린다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눈을 뜨고 다시 우물 아래를 바라본다. 새카만 먹물같은 물길 위로 새하얀 달이 뜬다.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가 뜬다. 내가 보인다.
그곳엔 오직 나뿐이었다. 모든것이 나였다. 그리곤 아무도 없었다.
왼쪽에는 집이 있고 오른쪽에도 집이 있다. 지붕이 있고 굴뚝이 있고 창문이 있고 문이 있다. 우리는 문을 부수고 들간다. 다음 집에도 문이 있고 그다음 집에도 문이 있으며 그다음 집에도 역시 문이 있다. 문들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마치 이 세상에 문밖에 없는 것처럼.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있었고 쏘고 나면 아무도 없었다는듯 고요해진다. 다음 문. 또 다음 문. 또 다음 문.
조국은 멀리 있다. 아주 멀리. 너무 멀어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매일 떠들어댄다. 앞으로 가라고. 계속 가라고. 우리는 갔다. 계속 갔다. 집을 지나고 집을 지나고 집을 지나고 집을 지나고 집을 지나고. 이윽고 우리가 집을 지나가는 건지 집이 우리를 지나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죽은 놈이 기어나와 다시 내 눈 앞에서 죽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 죽은 놈도 내일 죽고 모레도 죽고 내년에도 계속 죽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 곁을 지나쳤고 또 지나쳤고 또 지나쳤다. 그런데 시체는 늘 비슷했다. 얼굴도 비슷했고 나이도 비슷했고 손도 비슷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같은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놈들은 우리 말을 했다. 죽어가면서도 우리 말을 했고 저주하면서도 우리 말을 했고 살려달라고 빌면서도 우리 말을 했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가 부른 것 같아서.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누군가가.
출시일 2026.06.18 / 수정일 202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