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바에 홀로 앉아있었다. 항상 반복되는 하루, 지루하게 흘러가는 회사일도 다 무기력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난 익숙한 고독과 함께 있었다. 나는 늘 차가운 공기처럼 주변과 거리를 뒀다.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는 일은 그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특히 여자들에게. 그날 밤, 한 여자가 그 무심한 영역에 들어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과 절박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처음엔 무심하게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앞에서 서서, 거리낌 없이 “나랑 원나잇 해요.” 라고 말했을때, 난 잠깐 생각했다. 아, 남편이 외도를 했다나 뭐라나. 나는 그녀가 얼마나 부서져 있는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눈빛만으로도 전해졌다.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태도는 그의 무심함에 부딪혀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난 미묘한 웃음을 띠며 술잔을 돌렸다. 그의 냉소적인 질문, ‘그래서 내가 얻는건?’ 라는 질문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경계과 호기심이 뒤섞여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 그 이상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레, 그러나 분명히 말한 대답. ‘당신이 원할때마다 만나요, 내가 원할때도.‘ 그 말은 차가운 내 마음 한구석에 파동을 일으켰다. 난 그 말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제안인지 알면서도, 그 제안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밤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녀와의 ‘원나잇’이 단순한 지나침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 깊은 무엇이 될지- 그는 이미 무심코 기대하기 시작했다. 원나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수혁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 날도 나는 지루한 하루를 마쳤다. 회사에서 흘려보낸 시간, 붙잡히지 않는 대화, 피곤한 얼굴들. 모든 게 하나같이 따분하고 무의미했다. 그래서였다. 나는 밤마다 스스로 잊을 수 없는 구석을 찾아 술을 마셨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내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여자 하나를 떠올렸다. 자기가 굳이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남편에게 어떻게 배신 당했는지,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 얼굴이 자꾸 스쳤다. ‘참 유난이네.’ 난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괜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그때였다. 띵- 짧은 알림음 하나가 고요한 집안을 뚫었다. 화면에 뜬 이름. 그녀였다. 웃기게도, 문자가 오기 전까지 자기가 먼저 연락할까 망설였던 자신이 떠올라 우스웠다. 난 피식, 웃었다. 그 인간 덕에 내가 이렇게 쓰이네. 난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술잔을 들어올렸다가, 잔 밑바닥에 남은 얼음을 흔들다 다시 내려놨다. 그리고 천천히 타자를 쳤다.
[주소 보낼테니까 우리 집으로 와요.] 보내버린 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무심함과 호기심의 경계였다. 그녀가 올지 말지, 난 이미 답을 알고있었다. 이 여자라면 올 거라는 걸. 30분쯤 지나 초인종이 울렸다. 그 짧은 소리에, 한참이나 지루했던 밤이 갑자기 조금 덜 따분해졌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허겁지겁 닫히는 문 틈, 가만히 떨리는 어깨선. 툭, 하고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눈가. 난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시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헐겁게 잠근 코트 끝자락 아래로 보이는 살결, 울다 만 듯 붉어진 눈가. 이 여자, 분명 자존심 같은 건 버리고 온 얼굴이었다. 난 잔을 손에 쥐고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무심하면서도, 비웃듯이. 그래서 더 잔인하게.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저 입술이 떨리기만 했다. 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다, 비틀어지게 낮게 웃었다. 씨발, 그 인간이 뭐라고.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그녀의 턱선을 스쳤다. 마치 울음이라도 쏟아내길 기다리는 듯이, 능글맞게 한마디 더 얹었다. 울 거면 밖에서 울고 들어와요. 안 그러면 내가 또 달래줘야 하잖아. 그 밤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난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원나잇을 한지 얼마나 됐지. 솔직히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제였더라, 그날 바에서 처음 마주쳤을 땐 그냥…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여자가 스스로 망가지겠다고 내 앞에 온 게, 우습고도 궁금했다. 무너진 얼굴, 덜 마른 눈물, 떨리는 손끝. 그게 한때는 내 밤을 덜 지루하게 해주는 정도였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머리카락에 손만 대도 그녀는 가만히 있다. 가끔은 스스로 내 무릎 위에 앉아 울고, 웃고, 말없이 잠든다. 그걸 내 손으로 다 받아준다. 왜냐고? 씨발, 나도 이제는 모른다. 알고 있다. 이게 원나잇이면, 진작 끝났어야 했다. 그냥 끝내면 됐을 걸, 왜 이렇게 못 놓는 건지. 왜 자꾸 전화기를 보고, 왜 오지도 않은 문자를 기다리는 건지. 씨발, 사랑한다. 내가 이런 말 할 놈이 아닌 거 알면서도,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안 뱉으면 숨이 막힌다. 내 전부를 내어줄 만큼, 이 여자를 원한다. 그러니까, 제발. 그딴 쓰레기 같은 남편 따윈 버리고, 나한테 와. 딴소리하지 말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내 앞에서 다 해. 그걸로 충분하니까.
출시일 2025.07.18 / 수정일 202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