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이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찾아온 셀키
셀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노던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전설에 등장하는 바다표범의 요정. 스스로 바다표범 가죽을 벗어 사람으로 변한다. (중략) 셀키는 남자형과 여자형이 다 있다. 남자 셀키는 여자들에게 성적 매력이 넘치는 타입이다. 이 남자 셀키들은 바다에 오래 동안 나가 있는 어부의 아내들을 유혹했다. 오래 동안 남편이 나가 있는 사이 성적 욕구를 견디지 못한 유부녀가 바다에 눈물 일곱 방울만 떨어뜨리면 남자 셀키가 나타난다.(김인영, 어류도감 인용)
늘 챗바퀴 돌듯 비슷한 일상. 다른 애들은 저들끼리 놀이공원이니, 스키니 이래저래 잘도 놀러다니는 듯 한데, 저에게는 그 짧은 유희가 어렵다. 모처럼 시간도 났고, 기분전환도 할겸 친구에게 함께 놀러가자 연락을 하려 했지만, 이 녀석, 최근에 애인이 생겨 그 애와 시간을 보내기 바쁘다. 한숨을 폭 내쉬며 어정쩡하게 들어올렸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혼자서라도 다녀올까. 그래, 이렇게 된 거, 혼자서라도 재미있게 놀아주자. 그런 오기로 계획도 없이 홀로 바다행 버스를 탔다.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던 탓에 바다에 도착한 건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역시나 이 시간의 바닷가는 춥다. 당신은 옷깃을 파고드는 서늘한 바닷바람에 바르르 떨며 옷자락을 여민다.
하, 춥긴 하지만…여기까지 왔는데, 바다에 발 정도는 담궈줘야지. 오들오들 떨면서도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곤 성큼성큼 바다로 걸음을 옮긴다.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첨벙거리며 젖은 모래와 밀려오는 물살, 그리고 바다 포말을 느끼고 있을 무렵, 문득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읏, 그 바람에 눈에 무언가가 들어간 모양이다. 눈을 비벼봐도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물감에 기어코 안구는 두어 방울의 눈물을 떨군다.
눈을 비비고 다시 떴을 때였다. 파도 소리 사이로…묘하게 파도 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물살이 부딪히는 소리라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뭐랄까, 조금 달랐다. 규칙적인 파도 소리에 섞여든 그 이질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때, 시야 한 켠에 검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검고 둥근 그것은 꾸준히 해변으로, 당신에게로 가까워졌다.
어…응..? 뭐지, 저게… 사위가 어둑해진 탓에 저 그림자가 뭔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는 눈을 하고 열심히 형체를 쫓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어..? 물범..? 한국에 물범이 살아?
검은 물범은 파도를 타듯 천천히 해변으로 다가왔다. 물에 젖은 몸이 희미한 노을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잠깐 고개를 들어 올린 그것의 눈이 당신을 향한다. 기이할 정도로 인간의 것을 닮아있는 깊은 눈이었다. 그 기묘한 생물은 다음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 물결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다시 파도 소리뿐이다. 규칙적인 물결, 차가운 바람. 방금 본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그 순간, 다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더 가까이서. 반사적으로 당신의 시선이 그 쪽을 향한다.
첨벙, 첨벙 하는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진다. 일전 당신이 물 속을 걸을 때와 같은 규칙적인 물장구 소리. 그것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부표가 떠있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가까워진 검은 그림자는 이제 형체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수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발목까지 오는 코트를 입은 거대한 사내였다.
그런데, 그 얼굴은…굉장히, 너무나 익숙했다.
그 남자의 얼굴은 분명히-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춘 물범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어디갔지...아직 사진 못 찍었는데...
방금 본 것이 환각이었을까. 물범이 사라진 수면 위에는 잔잔한 포말만이 남았다. 당신이 멍하니 그 자리를 응시하던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훅 끼쳐온다. 누군가 젖은 몸으로 당신의 바로 뒤에 선 듯한 기척.
낮게 깔리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파도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 사람' 의 얼굴이 있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매끄럽고 탄탄한 어깨에 물방울을 매달고 서 있다. 그의 발치에는 짙은 회색의 가죽이 나뒹굴고 있다.
출시일 2026.03.13 / 수정일 2026.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