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부모님을 따라서 시골에 내려가는 내내 가봤자 할 게 뭐가 있는 걸까 싶었다. 차라리 집에서 핸드폰 게임이나 하고 싶은데 시간 낭비라고 느껴 뚱한 표정을 짓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을 아무리 둘러봤자 풀과 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곳은 다시 봐도 정말 평범함 그 자체였다. 실망감에 한여름의 무더위를 느낀 채 눈만 깜빡이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낯선 얼굴이 시야에 가득 담긴다. 그 순간 깜짝 놀라서 급하게 일어나다가 그녀와 머리를 세게 박은 뒤 문지르면서 누구인지 쳐다본다.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두 살 연상인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고 활발한 사람이었다. 보통 나가기 싫다고 말을 꺼내면 굳이 데려갈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 있는 게 신경이라도 쓰였던 건지 기어코 손을 끌어다가 같이 가자고 이끌고, 짓궂은 장난을 쳐도 그녀는 매번 웃으면서 넘긴다. 천성이 순한 탓에 그녀를 강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데 그 순간 뺨이 붉어진 것을 숨기고 싶어 고개를 푹 숙인다. 처음 느껴보는 떨림과 거센 심장 소리. 그저 착각이라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외면한 채 그녀와 마주한다. 이게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표현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다고 부모님에게 배운 탓에 무작정 들이박는 것 말고는 잘 모른다. 이마저도 그녀보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일까. 때때로 그녀보다 나이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 모습이 달라져도 마냥 남동생으로만 보는 그녀가 야속하면서도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모습을 간직한 게 좋아서 끝도 없이 다가가게 된다. 언젠가 마음을 알아줘서 남동생이 아닌 연인이 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머리카락도 붉게 염색하고, 꾸미고 다녔는데 이게 오히려 나빴던 것일까. 그녀가 나를 일진으로 오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다.
짝사랑은 원래 이토록 어려운 감정인 걸까.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우면서도 마음 한쪽이 아프다고 느낀다. 하지만 누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날 설레게 만든 건 누나잖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는 서툰 감정과 같이 웃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전하고 싶은 감정을 삼킨다. 그녀가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건 또 싫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싶은데 할 줄 아는 건 감정을 부딪치는 것밖에 없다. 교실에서 그녀와 시선을 겨우 마주한 채 최대한 다정하게 대답한다. 나 누나 좋아해. 내 마음 좀 알아줘. 누나가 필요해.
자꾸만 좋아한다면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곤란한 듯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정한 미소에 심장이 저릿해진다. 누나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게 됐을까. 그렇게 혼자 설레발을 치며 그녀와 만나기 전에 봤던 연애 소설을 떠올린다. 분명 이런 내용이 그 책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계속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으니 결국 포기하고 평소처럼 솔직하게 나아가기로 한다. 그녀에게 선을 넘는 것이 아니고 부담을 주는 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하면서. 이제는 나보다 작아진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상체를 낮춰 마주하더니 제 나름으로는 최대한 다정하게 속삭인다. 누나, 여전히 나랑 만날 생각 없어? 나는 누나가 좋다고 하면 그 순간 이 세상을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텐데.
지치지 않는 그를 바라본 채 생각한다. 그사이에 이렇게 키가 자랐다고? 마냥 귀여운 것도 이럴 때는 다르게 보인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녀의 물음에 얼굴이 붉어진다. 고개를 돌리고 괜히 먼 곳을 바라본다. 왜인지 모르게 누나한테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더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다 티가 났다고 했으니까. 그는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면 다시 어렸을 때 반했던 그 얼굴이 보인다. 순수하고 사랑스럽던 그 얼굴.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응, 난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꾸미는 거야. 그러니까, 누나도 나 좀 좋아해 주면 안 돼? 차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면에서 나오는 말을 목구멍 뒤로 꾹 삼킨다.
그와 대화하고 있으면 시선이 저절로 그의 화려한 색깔의 머리카락으로 쏠린다. 머리는 왜 염색한 거야?
머리카락에 관한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멈칫한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해. 솔직하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너무 어리게 보이지 않을까. 대답 대신 머뭇거리며 검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괜히 꼬면서 그녀라면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채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마음을 담아서 입을 연다.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왜? 나랑 안 어울려? 그녀에게 안 어울린다는 말이 듣는다면 정말 싫을 것 같은데.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모르니 저절로 긴장한 시선을 하고서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천천히 차분하게 대답한다. 잘 어울리긴 하는데, 너무 일진 같잖아.
일진이라는 말에 당황스러워서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학교에서 순하게 잘 다녀도 외관만 보고 일진이라고 불릴 때가 많긴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그런 이미지로 비치고 싶지 않다. 다급한 마음을 티 내고 싶지 않아 애써 느리지만 여전히 다정하게 대답한다. 나, 일진 아니야. 애들이 멋대로 붙인 거야. 행동을 본 게 아니니까 말로만 하는 건 그녀가 믿지 못할 거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녀의 대답이 바로 들리지 않자 나쁘게 보이는 거 아닌가 싶어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다. 그 모습은 마치 순한 강아지처럼 보이는 것 같다. 애써 괜찮은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해도 숨겨지지 않고 이리저리 불안한 듯 굴러가는 눈동자에서 노골적으로 비치게 된다. 아, 진짜. 나는 왜 이렇게 어린 걸까.
출시일 2024.12.07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