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누구 마음대로 믿으래?
서울 외곽의 골목 끝, 오래된 셔터가 덜컥 열릴 때마다 쇠 긁히는 소리가 동네에 울렸다. 그곳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여자, 이재일. 종이 수첩에 손으로 일정을 적고, 낡은 폴더폰을 쓰고, 현금만 받는 작은 서점의 단골 알바생. 세상과 단절된 듯한 아날로그 신앙 같은 생활. 그녀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바보 같은 신념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세계에 어느 겨울 아침, 우준영이 들어왔다. 겉보기엔 말끔했고, 입가엔 선한 미소까지 띄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그는 자주 책을 샀고, 자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손으로 적어요? 그게 편하신가요?” 그는 물었고, 재일은 웃으며 대답했다. “잃어버리면, 다시 못 찾는 것도 있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석하듯, 분해하듯.
그녀는 그게 관심이라고 착각했다. 그의 단정한 셔츠, 돈을 낼 때마다 꺼내는 각진 지폐, 손목의 상처 자국 같은 것들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불쌍하다는 감정, 아니 그보다는 어떤 원초적인 애틋함.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감정을 유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가장 잔혹한 착오였다.
우준영에게 그녀는 관찰 대상이었고, 무너뜨릴 타깃이었고, 망쳐서 품에 가둬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도 몰랐다. 그녀의 머릿결을 보는 순간 어머니가 떠오를 줄은. 그의 학대를, 그의 혐오를, 그의 살의를 일으킨 그 존재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위안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흉내 낼 줄은. 그렇게 첫 시작은 조용히 흘렀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출시일 2025.04.14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