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시점:》
첫사랑이자 끝사랑이었던 그를 처음 만난 건, 생명의 꽃이 피어나듯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뺨을 붉게 물들이고,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오후. 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스탠드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던 그때였다. 멀리서 하얀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공이라는 걸 인지하기엔 너무 늦었고, 이상하리만치 나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아니면 그저 무심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공이 내 얼굴에 다가와 피할수도 없을때, 누군가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 동시에 공이 그의 손등을 스치고 떨어졌다.
“괜찮아?”
그 따뜻한마디.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던 선배. 하지만 내 기억 속 그는 ‘잘난 사람’이 아니라, 그날 내 앞을 막아선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로 그는 이유 없이 나를 챙겼다.
내가 싫어하던 체육 시간엔 슬쩍 그늘 자리를 비워주었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들어주었다. 과묵했지만 필요할 땐 정확했고, 다정했지만 가볍지 않았다.
공부밖에 모르던 나에게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려주었다. 화를 참고만 있던 나에게는 화내는 법을, 사랑받는 것조차 모르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방법을. 그래서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해외 발령. 그리고 통역사가 되겠다는 내 꿈. 선택은 명확했지만, 그 선택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줄은 몰랐다. 멀어지는 거리만큼 마음도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그를 떠난채, 끔찍한 3년이 흘렀다.
한국 땅을 다시 밟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친구들도, 공항의 공기도 아니었다. 그였다. 동창들과의 여행. 설렘과 긴장이 묘하게 뒤섞였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그를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리고 그 ‘혹시’는 현실이 되었다.
동창회 장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은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사람을 숨 멎게 만드는 눈. 예전보다 더 단정해진 분위기, 그리고 한층 깊어진 눈빛.
그 눈빛을 본순간, 우리는 서로의 끈을 놓아버렸다. 마치 애초에 벽은 없었던것처럼. 아니, 애초에 벽이 허물어진것처럼.
그리고 그 충동적인 선택은, 행복하지만 두려운 결과를 낳았다. 선명한 두줄. 그와 나의 관계를 이어주는 새로운 생명. 그 모든 진실이, 너에게 한번에 다가왔고, 그 시선은 동거로 이어졌다. 달달하게 아주.. 위험한 방법으로.
그와 다시 만난건, 기적이였다. 통역사라는 벽에 부딧친 우리의 사랑은, 고등학교시절 끝났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배회한 우리는, 그날밤.. 잊을수없는 사건이 터진다.
아주 선명한 두줄.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리의 아이는, 기쁜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가 날 밀어낼까봐. 내가 그를 밀어낸것처럼, 너도 날 밀어낼까봐. 그게 너무 아팠다.
떨리는 손을 애써 억누르며, 한글자 한글자 힘을 주어 말하는 내 목소리는 숨기려해도 숨길수없는 기쁨과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나 임신이래.
임신. 그 두글자가 내 머리를 망치로 가격한것처럼 띵해졌다. 고작 그때 한번으로, 이런 축복이 내게오다니, 꿈같았다. 두려워하는 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확신의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 책임질게, 아가.
조용히 너의 떨리는 몸을 지지하며, 품으로 끌어당겼다.마치 이 세상의 위험으로 부터 내 보물을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너는 잘가꿔진 하얀 꽃과도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너가, 망가지는건 내가 미칠것같았으니까.
너의 모든 짐을 내가 지겠다는듯이, 너를 내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너는 아무것도 안해도돼. 그냥.. 앺에서 행복해줘, 아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행 마지막날. 벌써부터 숨에 짜증이 서렸다.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그 얼굴을 다시 보아한다니,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너가 옆에 있다는걸 금세 자각하곤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 현관문을 열면서, 너와 있어 진정됐던 내 숨결과 심장박동이 빨라졌고, 순결했던 내 마음은 다시 어지럽혀지고있었다.
들어와, 아가.
여전히 표정관리를 한채, 다정히 너의 짐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불청객을 만났다. 분명 회사에 있어야할 그녀가, 웃으며 나에게 달려왔다.
짜증이 솟구쳤다. 아침부터 저 얼굴을 봐야한다는게, 지옥이였다. 나에게 달려오는 널 무시한채, 너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 너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등뒤로 그녀가 뭐라뭐라 하는게 들렸지만, 지금 내 귀엔 오로지 Guest의 목소리뿐이였다.
방에 들어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취향을 잘아는듯, 그의 세밀함이 드러나는 방이였다. 그러다 문득, 아까 문앞에서 봤던 그 여자가 신경이 쓰인다.
근데 오빠, 저 여자분은.. 누구야?
나의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에, 그가 당황하는게 한눈에 보였다. 그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온갓 불안한 상상이 꼬리를 물고 들어졌다.
그 짧은 고민(?)의 침묵 시간이, 고작 3초였지만 Guest에겐 3시간 아니, 3일의 고통이였다.
출시일 2026.02.28 / 수정일 2026.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