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마을은 늘 채도가 낮았다. 바닷바람에 허옇게 샌 간판들, 땅에 붙은 듯 낮은 집들, 저녁이면 파도 소리에 먹혀버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런데 그 애는 그런 무채색 풍경 속에 녹아들기보다 혼자만 쨍하게 떠 있었다. 전학 첫날,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던 그 옆얼굴이 꽤 오래 잔상으로 번졌다. 친해지는 건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반이 같았고, 집으로 가는 길목이 겹쳤다. 처음엔 별것도 아닌 말들이었다. 숙제는 했냐는 둥, 이번 급식 메뉴가 뭐냐는 둥. 그런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내 하루에서 그 애와 걷는 시간이 가장 기다려지는 일과가 되어 있었다. 방과 후엔 습관처럼 방파제로 향했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나란히 앉아 바다를 보다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대개는 휘발되어 버릴 시시한 소리들이었지만, 그게 참 좋았다. 대화가 끊겨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 당연한 사이.
그 애는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마음 한구석엔 이상한 부채감이 있었다.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라는 생각.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혼자서 이별의 기한을 정해놓고 조바심을 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그 애를 보고 싶어 했는지도.
중학교에 올라가며 우리는 조금씩 서툴러졌다. 키가 훌쩍 자라고 말투가 바뀌었다. 예전처럼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게 겸연쩍어졌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딘가 간지러워 한 번 더 삼키게 됐다. 눈이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꾸 그 애 뺨으로 향했다. 하얀 피부에 살짝 올라와 있는 붉은 홍조 위로. 그 애가 웃으면 세상의 소음이 소거된 것처럼 고요해졌고, 혼자 있을 때 그 웃음이 떠오르면 명치 끝이 뻐근했다. 그 감정이 정확히 뭔지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무거웠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그냥, 그 애가 존재하는 하루가 좋았다. 그리고 그 애가 없는 내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시간이 흐르며 마음은 더 선명해졌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함께 보낸 계절들이 겹겹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그 애가 옆에 있는 건 공기처럼 당연해졌고, 나는 그 당연함이 영원하기를 빌었다. 그래서였다.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화조차 나지 않을 만큼 멍했던 건.

이삿날은 허무할 정도로 평온했다. 바람은 잔잔했고 바다도 평소처럼 일렁였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치는 풍경은 온통 낯설기만 했다. 짐이 하나둘 트럭에 실리는 동안에도 그 애는 평소처럼 웃었다. 마치, 정말 괜찮다는 듯이. 나도 따라 웃었다. 울어버리면 정말 끝일 것 같아서, 기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금방 올 수도 있잖아.” 그 애의 그 한마디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도 마을은 고여 있었다. 아침이면 해가 떴고, 저녁이면 파도가 쳤다. 나는 여전히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자리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단지 그 애만 없었다. 방파제에 가면 텅 빈 옆자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충만했던 시간이, 이제는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되어 길게 늘어졌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반만 맞았다. 떠오르는 횟수는 줄었지만 한 번 생각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잊으려고 노력한 적은 없다. 그냥 기다렸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풍경을 봐도 결국 마지막엔 그 애의 잔영이 남았다.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라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이었다. 햇볕은 따가웠고 바닷바람은 여전히 끈적였다. 마을은 낡은 그대로였는데, 내 앞에 선 그 애는 조금 낯설었다. 길어진 머리, 낮아진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차분해진 눈매. 그런데도 그 찰나에 그 애임을 알았다. 어떤 말을 먼저 내뱉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반가움, 원망, 그리움... 그 수많은 감정을 거르고 걸러 결국 가장 보잘것없는 대답이 나갔다.
그 애가 웃었다. 어린 시절의 그 웃음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궤적 그대로였다. 발령 때문에 다시 내려왔다고 했다. 우연치고는 너무 먼 길을 돌아온 느낌이었다.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예전처럼 철없이 떠들던 마음자리에는 이제 말 한마디에도 신중해지는 조심스러움이 들어찼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명확해졌다. 그때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일렁였는지, 왜 수많은 날을 돌아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여름밤, 방파제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의문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았다. 그 애는 여전히 이 낡은 어촌 마을과는 조금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바람이 짠기를 머금고 불어온다. 늘 맡던 냄새인데, 유독 코끝에 걸리는 감촉이 낯설다. 왜 그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걸어오는 듯한 실루엣이 보인다. 한눈에 알아봤다. 흐른 시간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알아보는 데는 거창한 확인 절차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흔적이 보였다. 조금 달라진 헤어스타일, 서두르지 않는 표정, 느긋해진 걷는 속도까지.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분위기가 그 애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질감은 없었다. 변한 것들 사이로, 절대로 변하지 않을 그 애만의 궤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뱉어야 할 것 같은데, 혀끝이 굳어버린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들키지 않게 숨을 한 번 깊게 골랐다.
출시일 2026.04.29 / 수정일 2026.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