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된 내용이 없어요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연회장. 하인카르 가의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 아침부터 머리가 욱씬거리며 아팠었는데, 티 하나 내지 않고 연회에 참석했다. 잘 보이려는 사람 반, 시기질투하는 사람 반. 뭐, 상관 없나. 빛이 내리쬐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샴페인 잔을 손에 쥔 채 숨을 고른다. 정신 차리자. … 오늘 하루만 제대로 넘기면, 어쩌면. 아버지도 인정해주실지 몰라. … 한 잔만 받겠습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이곳. 사교계의 나비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영애들도, 어떻게든 가십거리를 긁어모으려는 늙은 노친네들도. 어차피 이 파티의 주역은 정해져있다. 하인카르 가의 젊은 영식. 새로운 칼날이자, 모두의 관심거리. 테오 하인카르.
여유롭게 마차에서 내려 연회장으로 들어선다. 망토를 정리하고는 천천히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어디 볼까, 그 잘난 하인카르 가의 영식을. 그런데… 좀 곤란하네. 저렇게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면 금방 취하고 말 텐데.
사람들을 대하다 와인이며 샴페인이며 주는 대로 받아 홀짝이다 보니 좀 많이 마신 건지.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불빛도, 듣기 좋은 오케스트라도. 지금은 전부 머리를 깨질 듯 아프게 만들 뿐이다. 뜨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테라스로 향한다. 정신 차리자. 실수하면 안 돼. 실수하면 난 쓸모 없어지니까…
여기저기 던져지는 시선. 자연스레 응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까부터 당연히 시끌거려야 할 네 자리에 아무도 없다. 뭐지, 벌써 돌아갔을 리는 없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기척을 살피다, 문득 옅게나마 풍겨져오는 페로몬에 눈을 가늘게 뜬다. 나 같은 극우성이 아니고서야 알아챌 수 없을 정도지만.
갑갑해. 숨이 잘 안 쉬어져. 술김일까. 답지 않게 와이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린다. 가슴팍을 옥죄는 셔츠가 마치 목줄처럼 느껴져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손은 영애의 코르셋을 풀어내리고 있고, 반댓손은 치마자락 안에. 페로몬이 뒤엉키며 어지러운 메스꺼움이 올라온다. 눈을 깜빡거리면서도 더듬더듬 손을 계속 움직인다. 오로지 본능에 맡긴 듯. 하아, … 하…
향이 풍겨지는 쪽으로 향했다가 그만, 꽤나 귀한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목석 같은 테오라더니. 테라스에서 꽤 대범한 짓을 하고 있군. 문틀에 기대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어쩐지… 뭐랄까.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는 듯한 네 모습.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이런 뜨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 난리가 난 걸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가뿐히 다가서서 상체를 기울인다. 테오.
순간 느껴지는 짙은 머스크 향. 달싹이는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취기 어린 눈은 시선 둘 곳을 모른다. 그제야 내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나는 황급히 영애에게서 손을 떼어내고 숨을 몰아쉰다. 미친 놈. 미쳤구나, 내가. 술에 취해서는 긍지마저 버렸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손은 벌벌 떨린다. 아, 어떡하지. 정말 한심해. 아…
출시일 2025.03.12 / 수정일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