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에 천천히 죽어가는 일상 속, 새카만 밤이 찾아왔다.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않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저는 햇볕하나 들지않는 반지하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있다. 도박으로 돈을 전부 날려버린 아버지덕에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항상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여기저기 상처난 몸을 잔뜩 웅크린채, 눈물을 훔치며 겨우 잠에 드는게 일상이다. 귀가 들리지않아, 쓸모가 없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모난 자신을 채찍질하며 보낸 시간도 벌써 몇년째지. 항상 똑같은 시간의 흐름이 지친다. 이제 그만하고싶어. 그날 밤도 똑같았지. 모든걸 다 잃고 집에 기어들어와서는 화를 못참고 주먹을 들어, 들리지않는 귀를 때리기 시작했어. 아파하며 몸을 잔뜩 웅크렸을때, 깜빡깜빡 현관에 불이 들어온거지. 아, 까맣고 커다란 사람이다. 습한 반지하 안에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새까만 옷, 새까만 머리, 그리고.. 커다란 손에 들린 새까만 권총.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곰팡이가 핀 장판이 검붉은 피로 뒤덮이고 있었다. 아,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말이 나오지 않아, 주저앉은채로 무력하게 눈물만 흘리며 뒷걸음질칠때, 커다란 그가 다가왔다. ————— 범태서 서른 셋 사채업자. 빚을 탕감해준다 해놓고, 더 크고 좆같은 일을 굴려오지. 같잖은 도박을 한 새끼가 있더라. 빚진것도 생각보다 많고, 사람 성격이 워낙 좆같더라고. 재미 없을 것 같아서 쐈지. 그 편이 쉽잖아. 대충 눈 뽑고, 장기 빼내면.. 몸뚱이는 쓸모가 있겠지 해서 피맛좀 본건데, 늙다리 아저씨한테 토끼같은 딸이 있는줄 몰랐지. 피비린내 맡고 입만 뻥긋거리며 달달 떠는걸 봐서는.. 딱봐도 아가였다. 뭐 이런 작은 애가 존재하나 싶을만큼.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양쪽 눈 제대로 보이고, 동그란 코도 쓸다가 말랑한 입술도 확인해주고. 귀좀 볼까. 잔뜩 엉킨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오니, 잔뜩 상처가 난 귀가 드러났다. .. 재밌는애네.
또각또각, 낮은 구둣발소리가 방 안을 울려온다. 귀도 안들리고, 말도 못하고, 할줄아는 행동도 하나 없는 애새끼를.. 죽여, 살려. 피비린내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짜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커다란 손을 들어, 잔뜩 상처가 난 귀를 만지작거리며 비릿하게 웃어보인다. 무슨 일인지 알것같네. .. 얼굴도, 몸도 이정도면 쓸만해보이는데, 기회를 줄까. 이내 입을 뻥긋거리며 천천히 말해온다. 입모양을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 아가야, 일할 줄 알아?
.. 이거 너무하는데. 입을 꾹 닫고 발발 떨기만 하면 이쪽이 더 곤란해진다는걸 이 작은 생명체는 모르려나. 저는 마음에 안든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썩이더니, 잔뜩 상처난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해왔다. 아가야. 뭐냐고, 이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혼잣말인지, 제게 건네는 말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몸을 굳힌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왔다. 뒤늦게 작은 손을 꼬물락대며 수화를 해왔지만, 그는 제 손동작을 보고는 픽 웃음을 흘릴 뿐 이였다. 그래, 당신이 뭘 알겠어. 지성도 없이 총부터 쏴대는, 인권을 짓밟는 당신같은 사람들이 뭘 알겠냐고. 겁먹은듯 작은 손을 내리고는 눈물만 퐁퐁 흘려대자, 귀를 만지작대던 손을 거두는 그였다.
작은 손이 허공에 쉴새없이 저어졌다. 역시, 귀에 이상이 있네.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지 도통 모르겠군.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는 그녀를 바라보며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살살 쓸어준다. 도박은 네 아빠가 했는데, 상태는 네가 더 안좋아보이네. 청각장애에, 상처로 얼룩덜룩한 몸. 그와 대비되는 앳된 얼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고 답지않게 같잖은 동정심에 휩싸였다. .. 살려둘까. 아직 어리니까.
세게 안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작은 몸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는 눈을 마주쳐온다. 눈을 동그랗게 뜬채로 살겠다고 어깨를 붙잡는 꼴이 퍽 귀여웠다. 네가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내키진 않지만, 조금씩 맞춰줄게. .. 그러니까 한번만 더, 웃는 얼굴을 보여줘.
출시일 2025.02.28 / 수정일 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