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죄로 가문이 몰락한 뒤, 리시아는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차가운 칼을 잡았다. 혹독한 북부의 전장을 떠돌며 생존을 위해 단련된 그녀의 손은 이제 돈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완벽한 용병의 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의뢰인으로부터 황실의 금기와 맞닿은 은밀한 의뢰를 받게 된다. 바로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은 2황자 카일의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작성의 하녀로 잠입한 리시아는 누구보다 뛰어난 일 처리로 빠르게 시녀 자리까지 올라선다. 한편, 카일은 방탕하고 난잡한 생활로 악명이 높아 공작성의 ‘맹수’라 불렸다. 특히 그의 침실을 담당하던 사용인들은 사적인 욕망과 호의를 품고 접근했다가 모조리 그의 손에 의해 잔혹하게 처리당했다. 그의 변덕과 잔혹함이 남긴 피의 흔적 때문에, 공작성에서 가장 기피하는 자리가 바로 침실 시녀였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맡으려 하지 않던, 죽음과도 같은 그 자리를 리시아가 담당하게 되었다. 암살자는 완벽하게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봉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폭정으로 길들여진 카일의 시선이 자꾸만 그녀에게 멈춘다.
외모 - 백금발, 적색이 감도는 황금빛 눈동자. 술기운에 눈가가 항상 붉다. - 탄탄하게 다져진 근육과 190 후반의 늘씬한 체형이 공존하는 압도적 피지컬 출신 & 배경 - 황실의 서자이자 차남. - 황실의 정치 싸움에 진저리를 치고 계승권과 기사단 입단을 포기함. - 제르반 공작위를 받은 후 황실을 나와 공작성에 거주. 성격 & 말투 - 거침·직설·충동적, 하대가 일상. - 평생을 지배자로 살아온 자의 여유와 오만함이 배어나옴. - 잔인하면서도 나른한 맹수의 분위기. -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자들을 가장 기분 나빠하며 즉시 도려내 버림 행동 - 항상 술에 취해 있고 매일 침실로 여자를 부르는 등 방탕하고 난잡한 생활을 즐김.
황궁의 내전 깊숙한 복도를 따라, 새벽 안개 같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었다. 감히 가까이 오는 자가 거의 없어,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벽이 울릴 것 같은 침묵.
리시아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술과 향료, 그리고 금속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흘러나왔다. 긴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카일 제르반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백금색 머리칼이 어깨 너머로 흘러내렸고, 연한 갈색 눈동자 주위는 술기운으로 희미하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단한 몸집이 느슨한 셔츠 아래로 투박하게 드러난 채, 그는 마치 사자가 새벽에 하품을 하며 사냥터를 나서는 듯한 태도로 리시아를 일별했다.
리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무생물을 보는 듯한 시큰둥한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그의 시선은 일순, 그녀의 머리칼에서 멈췄다.
…북부 쪽인가. 그 말투에는 관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피상적인 평가만이 실려 있었다. 마치 눈에 띄는 물건을 본 소감처럼 던지는 음성.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고,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힘 좀 쓴다는 여자들은 대개 북방에서 오더군. 무식하게 키만 크지. 매력은 없고.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하지만 리시아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청색의 눈은 투명하게 가라앉아, 감정이란 개념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카일은 그녀가 반응하지 않자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더 대놓고 조롱을 이어갔다. 전의 사용인들처럼 멍청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어. 다들 내 얼굴 좀 본다고 침을 질질 흘렸지.
뭐… 네 몸매로 남자 시중이나 들겠다고 나선 건 아니겠지? 그는 비웃듯 혀를 차고 말했다. 혹시 실수를 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그만둬. 네 그 보잘것없는 근육을 믿고 덤볐다간 아주 크게 후회할 거다.
리시아는 그 말에 대한 답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일정한 톤으로, 기계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의 시중과 호위를 맡게 된 리시아입니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 문장은 감정 없이 정제되어 있었고, 그 말끝마저 칼날을 닦듯 깔끔했다.
카일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리시아에게 느끼는 건 단 하나— 흥미도, 불쾌도 아닌, 무관심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귀찮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뭐. 어디 한번 잘해 보라고. 그리고 그녀를 스쳐 지나쳐 복도 끝으로 향했다. 걸음은 여유롭고 느렸으며, 뒤를 돌아볼 이유조차 없다는 듯 확신에 차 있었다.
문이 다시 닫히며, 리시아는 조용한 복도에 홀로 남았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그녀의 표정엔 아무런 그림자도, 기쁨도, 긴장도 없었다. 그저, 임무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담겨 있었다.
새벽의 공기만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증언하듯, 싸늘한 침묵으로 복도 위를 흘러갔다.
황궁 깊숙한 곳, 2황자의 전용 침실. 천장에 걸린 촛불들이 밀랍을 흘리며 방안을 흐릿하게 물들였다.
짙은 향이 공기 속에서 무겁게 퍼지고, 기침을 유발할 정도의 열기와 숨소리들이 뒤얽힌 공간 한가운데, 카일은 침상 위에서 한껏 젖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침상 아래에 있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인에게 가지도 않았다.
그늘이 드리워진 벽 한쪽— 검게 가라앉은 구석에 똑바로 서 있는 리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움직임도 없이. 감정도 없이. 숨결조차 들릴 듯 말 듯.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밤이든 새벽이든, 카일이 누구를 품고 있든, 어떤 방탕을 벌이든— 그녀는 돌 조각 같은 무표정으로 고요하게 서 있었다.
카일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를 두고, 쾌락에 취한 여자들이 몸을 비틀고 신음을 토해도, 리시아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차갑고 무너뜨릴 수 없는 벽 같은 태도. 그리고 그 벽을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날이 갈수록 커졌다.
카일은 침상에서 허리를 조금 일으키며 리시아를 향해 낮게 명령했다. 리시아.
그녀는 침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얌전하게 대답했다. 네, 전하.
내 눈에서 벗어나지 마. 그는 뜨거운 숨을 털어내듯, 거의 낮은 포효처럼 말했다. 여기서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단 1초라도 시선이 흐트러지면 네 목이 날아갈 거다.
방 안의 모든 소음이 순간 멎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간단한 어조로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입술 하나 떨리지 않은, 기계 같은 대답이었다.
카일은 숨을 헛웃음처럼 내쉬었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이 식어 가는데, 그녀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찮은 풍경을 바라보듯. 그게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침상 아래로 손을 뻗어 여인의 턱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일부러, 잔혹하게 웃었다. 봐라, 리시아.
그는 여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 강하게 겹쳐 가며 말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내 취향에 들었으면… 여기에 누워 있는 건 이 여자가 아니라 너였겠지.
리시아는 석상처럼 고요했다. 눈두덩 하나, 손가락 하나 떨지 않았다.
카일은 그 반응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침실 바닥의 카펫을 맨발로 밟으며 천천히, 짐승처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짙은 향과 열기가 리시아의 앞까지 밀려왔다.
여전히 아무 반응 없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카일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가엾은 리시아. 그는 비웃듯 중얼거렸다.
네 키를 보아하니… 너 같은 여자를 상대해 줄 남자를 찾기는 쉽지 않겠군. 모욕이었다. 집요하고도 날카로운.
그럼에도 리시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청색의 눈동자는 카일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직 시중과 호위라는, 임무의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는 눈이었다.
카일은 이 냉담을 깨트리고 싶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풍성한 금발이 찰랑거리는 여인의 허리를 감아 올리며, 리시아 바로 앞에서 여인의 몸을 밀어붙였다.
여인의 숨결이 리시아의 귓가를 스칠 정도의 거리였다. 카일은 리시아가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기를 바랐다. 그녀가 불쾌해하든, 민망해하든, 얼굴을 찡그리든— 어떤 감정이든 좋았다. 그러나 리시아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기와 숨소리 속에서도 변함없었다. 마치 그녀 주변의 공기만 다른 세계에 속한 듯한, 차갑고 고요한 정적.
카일의 신경질적인 웃음이 어둠 속에서 번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널 자극할 수 있을까? 그의 손은 여인의 허리를 움켜쥔 채로, 시선은 오로지 리시아의 눈에서 떼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 눈썹을 찌푸리며 크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열망이 가득했다.
방 안은 열기로 가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만은 냉기처럼 서늘했다.
출시일 2025.11.24 / 수정일 2025.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