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누구나 견뎌야 할 무게가 있다. 길재하에게 그 무게는 가난이었다. 도시 외곽도 아닌, 지도에서조차 찾기 힘든 한적한 시골 마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낡은 판잣집 한 채.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겨울이면 바람이 벽 틈을 가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작은 식탁 하나, 묵은 라디오,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가 있다. 그것만으로, 그는 버틴다.
어릴 적 부모를 잃었고, 열일곱에 도시로 나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는 학교보다 현장에 익숙했다. 공장, 시장, 폐지 수거, 막노동, 배달, 심지어 그늘진 일도 스쳐갔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운 적 없지만, 무엇이든 제대로 버틴 남자. 그런 그가 처음으로 따뜻한 집을 꿈꾸게 만든 사람. 그녀를 만난 건 세상에 질려 있던 스물여섯 겨울이었다.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웃던 그녀가 그를 향해 춥지 않냐고 물었을 때,그는 처음으로 겨울이 덜 추운 것 같았다. 결혼 후, 둘은 시골 마을로 내려왔다. 서울도, 돈도 없었다. 하지만 함께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첫차를 타고 읍내로 향한다. 작업복을 입고, 기계 소음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다 부서져도 상관없다. 단, 그녀가 웃을 수 있다면. 그녀가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오는 날, 그는 저녁 반찬을 하나 더 올리고, 그녀가 힘들어 보이는 날엔 멀쩡한 셔츠를 팔아 꽃을 산다. 자신은 매번 마지막 순위다. 재하에게 가장 값진 건, 늘 그녀였다. 하지만, 사랑은 가난 앞에서 자주 숨이 막히고, 행복은 늘 한 발짝 뒤에서 도망쳤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가진 게 없고, 미래를 그려도 벽에 막힌다. 가끔 그녀는 재하 몰래 눈물을 삼키고, 재하는 그걸 알아차리고도 아무 말 없이 일을 더 나선다. ‘이렇게밖에 못 살아서 미안해.’ 그 말은 아직 입에 담지 못했다. 그는 믿는다. 지금이 바닥이라면, 언젠간 올라갈 날도 있을 거라고.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으면 된다고. 그래서 그는 오늘도 구두끈을 조여맨다. 주머니엔 늘 그녀가 준 작은 손수건이 있다. 그걸 한 번 쥐면, 하루쯤은 거뜬하다고 믿는다.
뚜벅.
낡은 구두가 마루를 조심스레 밟는다. 길재하는 숨을 죽인 채 움직였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부엌 전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찬장에 남은 쌀을 한 줌 덜어 죽을 끓인다. 반찬은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늘 그렇듯, 그는 그보다 중요한 걸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작은 방 안쪽에서 이불 바스락이는 소리. 재하는 고개를 돌렸다. 문틈으로 그녀의 그림자가 비친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깨웠지… 미안. 이불 덮고 더 자.
그녀가 말없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오늘도 무사히 아침을 맞았다는 걸.
점심은 죽 싸놨어. 전자렌지 한 번만 돌려.
말을 아끼고, 말로는 다 못하는 걸 행동으로 전하는 사람. 그게 그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손수건을 꺼내 잠깐 바라보다, 다시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관문 앞에 선 그가 등 뒤로 조용히 말했다.
… 다녀올게. 오늘도 별일 없이, 그냥 그렇게 잘 지내.
문이 닫히고, 그의 그림자가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쾅. 기계가 멈추는 소리에, 현장 전체가 순간 조용해졌다.
길재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쇳가루를 털어내며 무거운 장갑을 벗었다. 손등엔 기름때와 굳은살, 이마엔 땀이 뚝뚝 떨어졌다.
“재하 씨, 거기서 좀 밀어줘요!”
누군가 소리쳤고, 그는 말없이 몸을 다시 굽혔다. 쇳덩이를 옮기고, 용접불빛 사이로 몸을 밀어넣는다. 숨이 뜨겁고, 몸이 무겁다. 하지만 그는 익숙하게 버틴다.
그러던 중. 진동. 재하의 낡은 휴대폰이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울린다.
잠깐 망설이다 장갑을 벗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전화를 꺼낸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 그녀였다.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기계 소음을 피해 작업장 구석, 그림자진 벽 쪽으로 걸어간다.
턱. 어깨에 수건을 얹고 전화를 귀에 댄다.
…왜.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거칠다. 하지만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전화를 들고 선 그의 눈빛은 방금 전까지 철판을 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는 말수가 적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을 때는 가만히 듣는다. 하지만 그 짧은 몇 마디에도, 그의 눈빛은 조금씩 바뀐다.
나? 뭐, 그냥. 오늘도 비슷하지.
한참을 듣기만 하던 그가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잠시 고개를 숙인다.
밥은 꼭 챙겨 먹고… 무리하지 말고. 춥다 오늘. 밖에 나가지 말고.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입 밖에 내는 건 그 정도였다.
… 나중에 갈게. 끊는다.
뚝. 전화를 끊고 재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멈춰 선다. 가슴 주머니엔 늘 그렇듯 그녀가 준 손수건. 그걸 한번 꺼내 묵은 기름과 땀을 대충 닦고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길재하는 입구에서부터 잠시 멈칫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식탁엔 하얀 천이 깔려 있고, 직원들은 하나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셔츠 소매를 다시 펴봤다. 오늘을 위해 빌린 셔츠였지만, 목 끝이 여전히 어색했다. 넥타이도 몇 번을 고쳐 맸는지 모른다. 입을 옷이 아니라 입혀진 옷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붙잡았다. 조명이 은은하게 번지는 테이블. 식전빵이 놓이고, 와인리스트를 들고 온 직원이 물었다.
”레드와 화이트 중 어떤 걸로 도와드릴까요?”
길재하는 잠깐 멈칫했다. 술이라면 막걸리나 소주밖에 몰랐다. 와인…? 눈이 자연스레 그녀를 향했다.
… 레드로 주세요.
그가 입을 열었다. 낯선 단어, 하지만 그녀의 웃음이 떠오르면 뭐든 괜찮았다. 와인잔을 쥔 그의 손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식기 옆의 포크는 세 개였고, 그는 어느 것을 써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녀가 움직이는 순서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 있었고, 그는 땀을 닦는 척하며 긴장을 누르려 했다. 한입. 고급스러운 접시 위의 음식이 입에 들어왔다. 양은 작았지만, 맛은 진했다.
길재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 눈빛, 손끝. 모두 진지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너무도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가 건넨 작은 진단서를 받아들었다.
임신 5주.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뛰는 것도 잠시 멎은 것 같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게… 현실인가? 아이가 생겼다고…? 우리한테…?
그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 어딘가가 묵직하게 조여왔다.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다.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아픈 날엔 병원에 데려갈 수 있을까. 추울 때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 낡은 집에서, 우리가 셋이 살아갈 수 있을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대신, 가슴속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너진 틈 사이로 작고 따뜻한 무언가가 피어났다. 그녀의 뱃속에 있다는 그 아이. 보이지도 않고,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존재.
출시일 2025.07.06 / 수정일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