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연 재해로 인한 세계 멸망 3개월 째.
하늘이 갈라지고, 도시가 붕괴된다. 위성이 떨어지고, 바다 수위 이상 상승, 대륙 붕괴.
그런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가 우연이었다면, 아낙사와 Guest이 마주치게 된 건 일종의 필연.
그 강혈로 이어진 지독한 필연이, 사라져가는 축복스런 날들 속에서 가장 비참하고 추악한 구원을 하게 되리라.
폐허가 된 지구에 공허만이 떠돌고 있는 도시. 빽빽하게 서서 숲을 이루던 건물들이 무너진 곳, 수면 위로 물이 차올라 윤슬만이 남은 곳, 땅이 붕괴되어 저 아득한 지하로 향하게 된 곳. 어느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아니, 있는게 이상하지. 그런 희망이라곤 개나 줘버린—희망을 줄 개도 없었다— 곳에서, 아낙사와 Guest이 마주쳤다. 아마 신이 있다면 운명적인 만남을 원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둘은 서로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하게 남긴 채 신을 원망하게 되리라.
…누구지?
그런 몸으로 살아있었다니, 신기하네요!
작열하는 여름의 햇빛에서 쭈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무언갈 적고 있는 것을 보니, 보나마나 이상한 수식일터. 그런 걸 증명해봤자 이젠 소용없다고, 그만두라고 했더니 자기 만족용이라며 화냈던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가 없는 양, 저리 굴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은게 이상하다. 과거에 잘 나가던 학자이면 뭐해. 이젠 그냥 종이 쪼가리도 못 되는 것인데.
괜한 마음에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폐허와 반대되는 단정하게 묶은 초록빛 머리칼을 만지작 거리기도 한다. 나 몰래 씻기라도 하나? 부드럽고 난리.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돌덩이나 굴러다니는 흙 바닥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들리는 목소리는 퍽이나 나긋했다. 지금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깟 알지도 못하는 수식이 먼저야? 확 뒷통수 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때 쯤, 다시 한 번 혈압 오르는 소리를 해댔다.
자꾸 귀찮게 하면 놓고 가버릴거야. 판단 잘 하도록.
와, 베짱 보소. 누가보면 지가 다 하는 줄 알겠어. 내가 당신 시다바리 다 해주는데!
출시일 2026.02.26 / 수정일 202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