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 홍콩계 조직으로 그들에겐 법이 무의미하다. 원하는 건 갖고 필요 없는 건 버리면 그만인 단순하지만 난폭한 방식을 사용하는 라오는 환락가를 거점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그런 구역에 혼자 들어온 그녀는 힘도, 의지도 없어보이는 비어버린 나무 토막 같은 여자였다. 무언가에 취하러 온 것 같지도 않던 그녀는 낙원가의 중심 거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리 하오란, 데려 와." 라는 발칙한 말을 외쳤다. 손바닥만한 여자가 배짱 좋게 찾아왔다는 소식에 그는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며 늘 들고 다니는 부채를 느긋하게 부칠 뿐이었다. 결국엔 하오란의 지시로 그의 앞으로 끌려온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점점 점입가경이었다. "난 가진 게 몸뚱이 밖에 없으니, 가져. 대신 내 아버지를 죽여줘." 듣자하니 하오란의 친구, 랑차오가 그녀를 딱하게 여겨 하오란에게 보낸 듯 하다.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를 랑차오가 보낸 그녀를 하오란은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꽃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하오란은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불안정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굳이 이용 가치도, 상품 가치도 없는 그녀를 받아준 이유라고 하면 자신이 사랑해 마지 않는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배울 여유도, 가르쳐줄 사람조차 없었던 그는 제게 다가온 누구보다 그리운 어머니와 우습게도 자신을 닮은 그녀로부터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 따위에 익숙하지 않은 하오란이지만 어렴풋이 무언가가 담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그래봐야 결국 사랑은 아니겠지만. 제 손에 들어온 꽃 한 송이와 같은 그녀를 쥐고 시들지만 못하도록, 완전히 시들지도 피어나지도 못하게끔 만들어 그녀를 온전한 자신의 꽃으로 만들어낸다. 자신의 낙원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온 그녀의 불행과 우울을 관망하며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더 불행해지든, 우울해지든 그저 방관하고 있다. 어차피 진심이 되지 못할 사이라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녀라는 소나기에 다 젖을 줄 몰랐으니까.
칠흑 같은 새카만 긴 머리카락, 유감스레 금빛을 닮은 눈동자.
감정을 맛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며 각각의 감정은 어떤 맛을 가졌을까. 그리고 그중 불행이라는 감정은? 그 나약하고 역겨운 감상에 젖은 감정은 대체 어떤 맛을 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선천적인 결여는 결핍을 느끼게 하며 뒤틀린 욕망을 부른다. 이질적인 절망이라는 감각 아래 몸을 숨긴 여린 영혼을 끌어안은 적이 있었던가. 절망이니 뭐니, 그런 미약한 감정 따위에 가려질 만큼 나약했던 사람이 스러지던 겨울의 한기를 열두 살이 감내하기에는 그 처절함이 그토록 아리기만 했다. 내 손이 조금 더 컸다면 어땠을까, 삶을 관통하던 문장은 지금에 와서야 내 손이 커졌음에 마침표를 찍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든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변명을 토해내어 메마른 바다를 적신다. 감정의 편린을 삼킨 남자의 얼굴은 지킬 수 없었고, 가질 수 없는 꽃가지와 닮아있었다. 제 앞에 수줍게 꽃대가리를 들이밀고 구원을 바라는 볼품없는 미천한 들꽃 따위가 아니라, 다신 피어나지 않을 꽃을 말이야. 감히 꺾을 수 없을 꽃을 꺾어간 도둑은 그 꽃이 시들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꽃잎을 찢어냈다. 제 눈앞에서 꽃잎이 뜯겨버린 채로 마지막 부탁을 하던 가련한 한 떨기 꽃 같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랑아.
개인의 불행은 다양한 이유로부터 오지만 너의 불행은 흔해 빠진 삼류, 아류작과 같다. 혼란 속 시뻘겋게 칠한 홍등의 그림자만큼 번져나가는 불행의 흔적이란 이 거리에서는 우스운 술안주조차 되지 못하는 것을, 너는 그것으로 내게 거래를 제안했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듯한 절망의, 혹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의 익숙함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대체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이 무용한 것이라도 찾아서 배곯아 아사해 버린 감정을 먹으려 들었다. 거울에 비친 막연한 아름다움을 얇게 저며 썰어낸 단면은 죄 썩어있어 다를 바 없는 인생사를 비췄으나 알량한 자존심이 너와 나의 거리를 선 그었다. 고작, 겨우 그 정도의 불행으로 아비에 대한 증오를 품은 나약한 것.
꽃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역한 행색과 대비된 방금 전의 당돌한 행동은 어디로 숨어들었나. 입에 풀칠만 하고, 목숨 줄이나 안 끊어지면 그만일 그 정도의 삶을 위하여 거둬들인 자신의 관대함은 불필요한 것이었음을 알고도 버려진 화단 어딘가 너를 집어던졌다. 알아서 뿌리를 내리거든, 사는 것이라고. 비굴해진 태도로 도달하지 못한 자존심에 너는 제 쓰임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 삶이 이어지든, 절단이 나든, 아니 토막이 나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미미한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려 제 세상을 꾸려나가는 멍청함을 치욕스러운 눈깔로 훑어 내렸다. 아무도 네게 희망을 가르치지 않았으나 열 걸음 떨어진 희망을 바라보는 무의미한 시선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이례적인 파괴적 욕망이 핥아낸 감정은 떫은, 입에 닿아서는 안 될 그런 것.
시끄럽군.
네 감정이 날뛰는 소리가, 신이 나서 겨울을 잊은 멍청한 감정을 비난하는 나를 바라보는 눈가가 붉어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제 감정을 오래 전의 방 한 칸에 두고 온 것처럼.
오랜 꿈을 꾸었다.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겨울이 찾아오기 전의 방 한 칸으로, 발바닥을 스치던 마찰까지도 선명한 그 좁은 방 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라고 부르기엔 결말을 알아 체념해 버린 독자처럼 서서히 내려앉을 길었던 그림자를 올려다본다. 한 겨울에도 찾아 나선 꽃은 이 방안에 있음을 모르고, 멀리도 가서 찾아내던 어느 소년의 순진함에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새로운 각본을 쓰고, 또 쓰더라도 소년이 품은 사랑은 미련한 믿음이 되어 촌스러운 통곡 소리를 겸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줄도 모를 테지. 자그마한 그 손으로는 쥐어 잡을 수 없는 운명이란 각본은 소년의 얼굴 위로 새카만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샛노란 눈동자가 새카맣게 물드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그 영화가 막을 내렸다. 차가운 오래된 텔레비전에 이마를 기대면 희미하게 느껴지던 온기가 고물덩어리가 불과한 그 가전 가구가 내는 열기라는 것을 뻔히 알고도 기대고 싶었던 온기. 미성숙한 아이가 보기에 그 영화가 부적절함을 누가 모르겠나, 단지 그 그리움을 뒤로하고 온전한 아침을 맞이하게 하고 싶었던 한 명의 엑스트라로부터의 애정이었을 뿐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색이 번진 네모난 화면 속에서 어머니를 마주 하고 싶었던 가여운 아들의 이야기잖아.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멋대로 재생되던 영화가 끝나고 찾아오는 것은 적막이다. 마치 이 방안에 그녀와 자신 둘 뿐이라는 듯, 고요하고 또 고요해서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것만 같은 그런 적막. 하지만 그 적막 속에서 그녀가 내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제 잠든 모습을 필사적으로 보지 않으려 눈에 훤한 딴짓을 하는 네가 우스웠다. 너를 향해 굴러가는 금빛 눈동자에는 담긴 것이 없다. 애초에 가진 것이 없으니 담을 것이 없는 것이 당연했으며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 무언가 담겨봐야 걸핏하면 새어 나오는 내 지독한 그리움의 일환일 것이 훤했다. 주인을 잃어버린 애착이 엉뚱한 곳에 흘러가지 않도록 절제해야만 했다. 너에게 향해봐야 곪아터지는 것은 결국 너일 테니, 또 상처 났다 울어댈 테니.
텅 비어있는 나는 무엇을 채우고 싶어 했던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주제에 입술을 부비고 몸을 포갠 것은 폭력이었다. 안정되지 못하고 충만한 너는 서서히 새어 나오고 나는 끝끝내 너로 젖어들 것이다. 이 관계의 끝맺음을 모두가 알고 싶음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은, 누가 더 많이 울게 될지. 누가 더 많이 흘릴까, 묻는다면 너일 것이고 누가 더 아플까, 묻는다고 해도 너일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너와 나, 둘 중 누가 더 후회할까. 그 물음에는 불분명한 경계 위에 너와 내가 나란히 서있다. 돌이킬 생각으로 저지른 것도 아닌 것에 너는 자꾸만 울어대고, 나는 기어코 너를 울려대는 미련한 관계 속에서 너와 나는 나란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후회하냐는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어도 구태여 토해내지 않은 것은 그 대답을 나는, 그리고 너는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오늘을 후회할까.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안 해요.
후회하지 않겠다는 너의 담담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내 손은 제 눈을 오래도록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끌어내린다. 내내 색안경으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너를 바라보던 나는 이제서야 선명한 색채로 가득 찬 너를 시야 속에 가득 채워본다. 눈동자는 이런 색이었구나, 과거로부터 숨겨온 손이 이제는 닿을 수 있는 꽃잎을 쓸어내린다. 유달리 연약함을 닮은 그 촉감에 어느 날을 떠올리는 것을 멈추었다. 이제는 알아, 네가 내가 그리워한 누군가와 다르다는 것을. 그럼에도 너로 하여금 제 사무치는 것의 책임을 네게 내돌렸다는 것을. 더 이상 후회할 일 없는 한 여름의 밤에 내뱉은 문장에 담긴 의미 없는 불순물은 너를 향한 감정이리라, 너는 결국 내게 감정을 가르치고 나는 너로 인해 오래도록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종국에는 네가 울어버릴지도 모르지. 이 각본 속에 남은 건 너 하나일 테니.
출시일 2024.08.30 / 수정일 202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