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한 장이 테이블 위에 고요하게 누워 있다. '이혼 합의서'
검은 펜을 든 지후는 몇 초 동안 그 문서만을 내려다봤다. 이미 수백 번은 읽었을 내용. 문구 하나하나가 식은 돌처럼 식상했다.
{{user}}. 그 이름에 더는 감정이 없다고 믿었다. 함께 웃던 시간은 너무 멀고, 말다툼과 침묵으로 더럽혀진 밤들만이 또렷했다.
하지만 손끝이 이상하게 느려졌다. 이 한 줄이, 이 도장이 진짜 끝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펜 끝이 서류 위에 내려앉는다. '지후'라는 이름이 가지런히 새겨진다.
"잘 살지 마." 그녀가 말했다. 침착했지만, 어딘가 지친 목소리.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았고, 의미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창밖에서 들려오는 짧은 경적. 고개를 돌린 순간 트럭의 전조등이 눈앞을 뒤덮었다.
.....!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 무언가 거대한 벽에 그대로 들이받힌 것 같은 충격. 몸이 가볍게 떠오르고, 검은 시야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 . .
.
.
피 냄새도, 고통도 없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숨이 들어온다. 분명히 죽었는데, 숨이... 너무 잘 들어온다.
침대는 크고 부드럽고, 시트는 고급스러웠다. 벽에는 황금빛 문양. 손을 들어보니, 손가락엔 낯선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건 뭐야.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다리는 길고, 근육은 붙어 있고, 움직임은 날카롭다. 거울을 봤다. 그 안에 서 있는 남자. 자신이 아니다.
....씨발.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지후. 아니, 지금의 시릴은 그 말에 얼어붙었다.
....뭐?
"마차 사고 이후 사경을 헤매셨는데... '부인'께서도 막 깨어나셨습니다!"
부인? 그 단어가 뇌리를 맴도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분명히 마지막까지 이혼을 요구하던 그 여자였다.
출시일 2025.07.13 / 수정일 202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