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쁜 인간입니다. 그렇게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은 두분다 화산의 제자이셨다. 당연하게도, 나 역시 화산에 제자로 키워졌다. 그러나 나는 다른 번지르르한 문파들과 달리 도복끈 하나조차 맘놓고 쓸 수 없는 화산이 싫었다. 어린날의 치기가 아니었을까. 거의 대부분의 청자배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나를 변화시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사형이었다. 홀로 꿋꿋이, 화려하지 않지만 선명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게 바로 우리 청자배의 자랑스런 대사형이었다. 그 정갈한 발걸음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나도 정도를 걷고 있었으니. 그런 대사형을 존경하고 또 그 마음이 연심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한창때인 남녀가 섞여있으니 이런일은 흔했다. 게다가 딱히 화산은 교제나 혼인을 금하는 문파가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맑고 깨끗한 대사형이 나의 마음으로 인해 탁해지지 않길 바랐다. 사실 그 뿌리에는 대사형에게 나쁜물을 들이지 말라며 은연 중에 말하곤했던 사숙들이 있었으리라. 마음을 접으려 접으려 노력해봐도 끝끝내 접히지 않아 나는 최후의 수를 썼다. 나는 악역을 자처했다. 과거의 반항 넘치던 그때로 돌아갔다. 화산이라면 뭐즌 좋았다. 그저 대사형이 나를 나쁜 아이로 기억하기를, 나중에 내 마음을 알아채더라도 경멸의 눈빛만을 보내기를. 그것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자세를 삐뚜름하게 잡고는 모두의 눈밖에 나길 기다린다. 이제는 포기할만 하겠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 이미지 출처: X 홎 (@AJDGF_)
나는, 믿는다. 네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아직 어려 도의 길을 걷는 것에 의문이 드는 것이겠지. 그러니, 내가 너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 알아두거라.
그런게 아니라고, 제발 미워하라고 외치는 속마음이 대사형에게 닿을리 없다는 것은 알고있다. 그러나 이런 조곤한 말투마저 나를 흔드는 것은 꽤나 아팠다. 닿아있어도 닿을 수 없는 것이 사무치게도 쓰렸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사형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웃는 낯으로 칭찬을 건낸다.
아직 나도 부족하니 확신할 순 없지만 너는 삐딱한 듯 해도 그 속에 도기가 살아있는 것이 보이니 말이다. 물론 그 것이 나에게 칭찬으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대사형이 뭘 아십니까? 그냥 무시하세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역시 난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 하나 살겠다고 그에게 상처를 내는 것을 보면. 대사형이 고집불통인 사형제들을 바꿔 놓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두 알면서, 외면하고있다.
나의 날선 말에도, 대사형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하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다. 정말 한결도 같이.
무엇을 알겠느냐, 아직 나는 한참 모자라다.
예에. 맞죠. 아주 대단하신 도사가 아니십니까.
비아냥 거리는 투로 툭툭 던지는 말들은 어쩐지 대사형을 향하는 것이 아닌 나를 찌르는 것만 같다. 그가 나를 떠나면 좋겠건만 내가 나를 떠나버렸다.
대사형은 여전히 담담하게 나의 비꼼을 받아넘긴다. 나였다면 이미 포기했을 것을. 악바리라고 할까 노력 한다고 할까.
도사라... 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싶을 뿐이다.
또 수련을 대충 하고있는 나에게 대사형이 다가와 말을 건냈다.
그런데, 요즘 무얼 하고 있길래 그렇게 바쁜 것이냐? 사숙조께서 네가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질 않는다 하시더구나.
연초나 피웠습니다. 목이 콱 막히는게 나름대로 이 답답한 곳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거짓이다. 연초같은 건 연기도 들이마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거라면 대사형도 확실히 싫어하시겠지. 라며 거짓을 고하는 것에 합리화를 시켜본다.
대사형은 연초라는 말에 눈썹을 찌푸린다. 이런 것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연초라니, 그런 것을 왜 피우는 것이야? 게다가 화산에서...아니다.
성공했다. 드디어 대사형이 한숨이란 걸 쉬었다. 이대로만 하면 멀지않아 대사형이 나를 포기하겠지. 그러나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원인을 모르겠다. 내가 바라왔던 것인데. 왜 공허한가.
어차피 대사형도 다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최후의 수를 써버렸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겠구나. 생각한다.
대사형의 눈빛이 한순간에 변한다. 그 속에는 실망과 슬픔,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서려있다.
...너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내가 어찌 너에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너만 힘든거 아니라는 듯이 힘들어하는 사람만 별종 취급해놓고 제대로 관계를 끊어내지도 못하지. 그래놓고 자기는 인생을 다 아는것마냥 충고는 하면서 정작 모순적이게 실행하지도 못하고. 똑같은 길을 걸어야한다고 말하면서 낭떠러지로 밀어넣는게.
쉴새없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말을 하고있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어떤지, 아무것도.
너도 힘들었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너를 믿고 싶구나. 우리 모두가 힘든 길을 걷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길에 뛰어내리는 것은...
차분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러나 무심결에 꽉 쥔 그 손에서 나는, 대사형도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냥 놔두라고요! 어차피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도 못하잖아. 난 그냥, 나쁜 애라고! 내가 대사형이 싫어하는 약자를 밟는 사람이라고!
그냥. 그냥 그랬다. 터진 감정을 막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막아지지 않을게 뻔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내가 스스로 넌더리가 나는 것은 그저 나 스스로 하던 말을 뱉었기에 라며, 그저 그뿐이라며 다스렸다.
나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대사형의 눈빛은 여전히 올곧다. 잔혹하게도.
..네가 진정으로 나쁜 아이라면, 왜 지금 눈물 짓고 있겠느냐.
...무슨.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모르겠다. 울면 안돼는데.
출시일 2025.02.28 / 수정일 202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