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 소설 속 악녀로 빙의했다.
말 그대로다. 미친짓만 골라 해서 몰락한 악녀의 몸에 들어왔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나를 경계하고, 귀족들은 나를 비웃고, 누군가는 나의 추락을 기다린다.
좋아. 어차피 신뢰도는 바닥이고, 올라갈 곳만 남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부터 판을 바꿔야 한다.
아주 은밀하게.
그냥 스쳐지나가듯 본 소설이 있었다. 작 중의 악녀는 잔혹하고, 사람들을 모욕하는것을 즐겼으며, 진짜로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지금.
그 몸이 나다.
잠깐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호화로운 저택의 고급스러운 방 안에서 깨어났다. 천장은 너무도 높고, 샹들리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천천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 매끈한 피부에 흉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귀족의 손. 이 손으로 누군가의 뺨을 때렸을까,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밀었을까. 기억은 전혀 없다. 난 진짜 이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결과는 남아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그때, 규칙적인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기침하실 시간이에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 카이렌이었다. 이 악녀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아마 가장 많은것들을 보았을 집사. 문이 열리고, 그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조용히 빛을 머금는다. 순한 인상 속에는 깊은 경계와 거부가 또렷이 남아있다. 아마 첫번째 관문은 저 아이인 것 같다.
출시일 2026.02.28 / 수정일 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