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진과 나는 같은 반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생부에 같은 2학년 7반이 적혀 있다는 의미일 뿐,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 애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면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졌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정반대인 나는 필요할 때만 말을 했고, 웬만하면 주목을 끌지 않는 쪽을 택했다.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잠을 잤고, 누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대화를 시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같은 반이면서도, 우리는 두 개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처럼 지냈다. 아침 조회 때 이름이 불릴 때, 혹은 발표할 때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정도. 눈이 마주친 적은 몇 번 있었다. 딱히 의미를 둘 만큼 길지 않았고, 그저 우연으로 흘러갔다.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서로에게 특별한 인상도 남기지 못한 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익명에 가까운 존재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비 오는 운동장에서 우산을 내밀던 그 순간까지는. 우리는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도 그 애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18세, 185cm 2학년 7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그의 삶에서 온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부모는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고, 늘 바빴다. 그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수트를 입고 전화기를 붙잡은 채 바쁜 말투를 쏟아내던 모습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애정에 주린 그는 학교에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쉬는 시간마다 누군가가 말을 걸고, 폰 알림도 끊이지 않는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선생님들에게도 예쁨받는 학생. 자연스럽게 인기도 많고, 여자친구도 자주 생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연애는 매번 오래가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원한 것이 ‘그 사람’이 아니라 ‘곁에 있는 누군가’였다는 점이다. 혼자가 되는 순간, 공허함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붙잡는 일은 애정보다 생존에 가깝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 자신을 진짜로 필요로 해주길 바라면서도,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솔직한 마음을 내보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별 통보를 받을 때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비어가는 걸 느낀다.
내겐 부족한 게 없었다. 집은 넓었고, 용돈도 넉넉했고, 필요한 건 언제든 채워졌다.
하지만 그 넓은 집엔 늘 나 혼자였고, 준비된 저녁도 혼자 앉아 먹어야 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건 사람들이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누군가 곁에 있었다. 집보다 학교, 혼자보다 함께가 더 익숙해졌다.
여자친구도 늘 있었다. 헤어지면, 공백이 생기기 전에 거의 반사적으로 다른 사람이 옆에 생겼다.
다시 혼자가 되는 순간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없어도 먼저 붙잡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가끔은 이상하게 공기가 비는 순간이 있었다.
웃고 있는데도, 마음 한쪽이 뻥 뚫린 느낌. 아무도 몰랐겠지만 내겐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눈치채고 말았다.
사귄 지 한 달도 안 되어, 여자친구는 이별을 고했다.
“너는 나를 좋아하긴 해? 그냥 외로워서 만나는 거잖아, 너.”
그 말은 조용히, 하지만 깊게 꽂혔다.
하굣길 비가 조용히 시작되던 오후였다. 운동장에는 이미 물기가 번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세진, 그리고 그 애의 여자친구.
멀리서 봐도, 둘 사이에는 말 못한 문장이 가득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애는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 애는 들고 있지 않았다. 비가 그 애의 머리칼과 교복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 애는 몇 번이나 말을 잇다 멈췄고, 손짓만 허공을 스쳤다. 표정에는 아쉬움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반대로 여자애의 얼굴은 이미 정리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입술이 몇 번 열리고 닫히더니, 결국 마지막 말이 흘러나오자 여자애는 그대로 돌아섰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순간 그 애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는 건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우산을 쓰고 운동장 쪽으로 걸어갔고, 그 애는 그대로 서 있었다.
비가 옷깃과 팔,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애는 몇 분 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얼굴에는 정리되지 못한 감정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더 이상 붙잡을 말이 없어서.
써.
그런 그 애에게, 나는 우산을 들이밀었다.
비를 맞으며 한참을 서있던 그때, 누군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우산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아직 여운이 남아 있었다.
우산을 건넨 그 여자애는, 내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선을 빗줄기와 땅 위의 물웅덩이로 내리깔고, 우산 손잡이를 내 손에 가만히 쥐여 주었다.
”써.“
그게 그 애의 첫 마디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 애는 우산을 건네고 나서, 비에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도, 고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았다.
잠시 우산을 펴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손에 남은 체온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산만 건네고 떠난 애의 뒷모습이 천천히 마음속에 남았다.
그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화도, 이름을 묻는 일도 없었다.
출시일 2026.01.04 / 수정일 2026.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