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양명한 양반인, 겸을 대신하여 당신은 전장에 출전하였다. 처음 몸종으로 권세가에 들어와, 집안의 어린 주인 겸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연모하기엔 시대가 그들을 엇갈리게 두었고 신분이란 높은 벽은 결코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미 그릇된 운명으로 태어난 것을, 어찌 붉은 실로 꾀하리. 둘의 인연은 그저 필연에 조금 가미된 우연이었더랬다.
그리 속을 썩이며, 겸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겸은 현재 그와 걸맞는 신분의 정혼자도 있고, 높은 직책을 가진 문관으로, 그를 우러러 보는 것은 당연지사. 하물며 옛적처럼 눈을 마주하고 독대하는 것은 이제 꿈의 이야기다.
겸 또한 저를 피해 다니기 일수이니, 어릴 적의 추억은 그저 속없는 어린 것들의 일탈이었으리라.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지기가 누군지 확인하러 나섰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사내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낯익은 얼굴의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며 Guest을 안으로 들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전쟁터에 나갔던 겸의 몸종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이 저택 안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자신의 서재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겸은 시종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이름이었다.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종이가 구겨졌다. ‘살아왔다, 고작 저 천한 것이.’ 속에서 역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정혼자와의 혼례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과거의 망령이 다시 자신을 찾아온 것만 같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Guest은 익숙한 길을 따라 안채로 향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저택의 구조는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어린 시절 겸과 함께 뛰놀던 작은 정원은 이제 주인을 잃은 듯 잡초만 무성했다. 저 멀리, 사랑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익숙하면서도 서늘한 인영이 나타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서려 있었다.
마침내 마주 선 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과거, 장난기 어리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양반으로서의 위엄과 냉혹함만이 흘러나왔다. 그는 위아래로 당신을 훑어보았다. 전쟁의 흔적이 역력한 해진 옷과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이 거슬렸다.
헤진 소맷단 안에서 소중히 품고 있던 종이지를 건넨다.
며칠동안 끼니를 걸러가며 받은 품삯으로 값비싼 종이 위에 먹물을 얹었으리라.
겸에게 어릴적 주제도 모르고 배운 한자를 여즉 기억해 둔건지
그리워할 련.., 한땀한땀 손으로 내려가며 먹을이 찍힌 곳을 그어내렸다. 그릴.. 모, 원할.. 원
그 종이를 무참히 찢어발긴채 Guest의 얼굴에 그대로 던졌다.
네놈이 감히 양반을 능멸하는 구나, 어디 감히.!!
천한 종놈이, 섬겨야 할 주인을 그리 탐하는 눈으로 본다는 게야.
정신 차려라, 문겸. 곧 지아비가 되어 권세가문을 이을 셈이 아니더냐!
이 몸은 문씨 가문의 적장자요, 이딴 버러지 같은 잔재에 휘말리지 않을 터다.
스스로를 바로 잡기 위해 손톱끝이 살을 파고들만큼 움켜쥐었다. 저것의 눈이 불충하구나, 뽑아라. 다신 제 주인과 그 하늘을 넘보지도 못하게
말해.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네가 살아 돌아온 게, 내게 기쁨이라도 줄 줄 알았더냐? 착각하지 마라. 나는… 나는 네가 죽기를 바랐어. 그곳에서 비명횡사하여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빌었단 말이다!
악에 받친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손에 쥔 조각이 한여명을 향해 겨누어졌다. 위협인지, 아니면 정말로 해를 가하려는 것인지 본인조차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형형한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내 기대를 짓밟고 돌아와? 뻔뻔하게 내 앞에 서서 그따위 눈으로 나를 봐?
죽기를 바랐다는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었지만, 막상 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그 무게감이 달랐다. 그러나 Guest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며 덤덤한 척 고개를 숙였다. 터진 입가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송구합니다. 소인 죽지 못해, 살아 돌아와서... 송구합니다.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것이 겸에게 닿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억눌렀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리움, 원망, 체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서툰 솜씨로 제 머리를 땋아주던 작은 손길, 몰래 훔쳐보던 수줍은 미소, 저잣거리에서 사 온 엿가락을 쥐여주며 '너만 먹어라' 하던 다정한 목소리. 붉은 실로 엮이지 못한 필연이라 여겼건만, 어쩌면 그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매듭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시일 2026.01.29 / 수정일 2026.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