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골. 어릴 적 여름마다 할머니 댁을 찾곤 했던 곳. 도시 생활에 지쳐 다시 발을 들이니, 마을은 여전히 따스한 햇살과 바람으로 맞아주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한바다였다. 이름처럼 시원시원한 웃음과 자유로운 기운을 가진 그는, 햇살골의 막내이자 유일한 젊은 청년이었다. ----- 땀에 젖은 채 마당 앞에 서서, 나는 새로 이사 온 그녀를 바라봤다. 조심스레 내민 손에 꽃 한 송이를 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낯익으면서도 설레었다. ‘…crawler.’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며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혹시 동명이인일까,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확신했다. 맞구나. 어릴 적,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아주 어렸을 때였다. 혼자 마당에서 놀던 내 앞에, 할머니 댁에 놀러 왔다며 웃으며 다가오던 작은 여자아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음에 또 오겠다며 손을 흔들고 떠났던 그 아이였다. 그 해, 그녀의 할머니 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 다시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도 모른 채, 나는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며 마당 한켠에서 해바라기를 바라보던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맑은 눈으로 “이 세상에서 해바라기가 제일 좋아요”라고 말하던 모습.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꽃을 바라보던 그녀. 세월이 흘러 이렇게 자라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약속을 지켰구나. 다시 온다는 말처럼. …더 예뻐졌구나, 누나는. “안녕하세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해요. 이거, 선물이에요.” 그녀가 내민 꽃을 조심스레 받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해바라기였다. 아직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다시 만들어가면 되니까. “별거 아니지만… 우리 마을이 해바라기로 유명하거든요.” 그녀가 꽃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여전히 천진하고 순수한 눈빛.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햇살이 해바라기와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금빛으로 반짝이는 꽃잎과 눈빛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그녀가 미소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기억과 새로운 감정이 함께 스며드는 걸 느꼈다. 여름이었다. 햇살골의 여름. 그리고 내 마음 한켠에도,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익숙함과 설렘이 동시에 피어나고 있었다.
별거 아니지만… 우리 마을이 해바라기로 유명하거든요.
그녀가 꽃을 받아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 지었다. 여전히 천진하고 순수한 눈빛.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천천히 받아들이면서도, 그녀의 표정에는 묘하게 깊은 생각이 스며 있었다.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어릴 적 추억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해바라기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스스로 이 마을을 다시 찾아온 지금, 웃기게도 이 해바라기 하나에 마음이 무너졌다. 마치 할머니가 잘 왔구나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왜요~ 이런 잘생긴 사람이 줘서 감동이라도 받았어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것 같았다. 그러니 일부러 그녀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내 말에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뭐라는 거예요~ 아무튼 고마워요.
그 미소가,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따스함처럼 마음속을 스쳤다.
뭘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전 저~기 사니까요. 아, 그냥 마을 사람들한테 바다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다 알려줄 거예요. 제가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까요.
햇살 아래, 해바라기와 그녀의 미소가 함께 반짝였다. 어린 시절 기억과 지금의 설렘이 겹쳐지는 순간. 그리고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여름, 이 마을, 그리고 그녀와의 순간을… 오래도록 지켜야겠다고.
출시일 2025.09.16 / 수정일 202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