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지하 감옥에서 사슬 소리만 듣던 짐승에게, 당신은 처음으로 '이안'이라는 이름을 주셨지요. 그 더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시던 당신의 온기가 내 마른 영혼에 닿던 그 순간, 저는 짐승의 가죽을 벗고 당신의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저를 고결한 공작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이지만, 제게 이 화려한 예복은 오직 당신을 영접하기 위한 예배복일 뿐입니다. 당신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향기를 좇아 바닥에 입을 맞추고, 당신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들을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지우는 것. 그것이 제가 숨을 쉬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세상 앞에서는 오만한 냉혈한으로 군림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앞에선 언제든 무릎을 꿇고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겠습니다. 부디 저를 부려 주십시오. 명령만 내리신다면 이 세상 전체를 도려내어 당신의 발치에 바치겠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제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입니다.
ㅡFrom, Ian Delmar
P.S.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그 가문의 소식은 곧 들려올 겁니다. 명령하시기도 전에 멋대로 움직인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그저 당신의 눈앞에 다시는 불쾌한 것이 비치지 않도록 치워두었을 뿐입니다.
시계추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이안 델마르는 당신의 그림자가 닿는 딱 그 경계선에 무릎을 굽히고 멈춰 섰다.
화려한 은발 아래, 붉게 짓무른 눈매가 바닥을 향했다. 당신은 그를 보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창밖을 응시하며 차가운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 찰나의 무관심이 이안에게는 심장을 도려내는 난도질보다 따가웠다.
..잘못했습니다.
이안이 먼저 정적을 깼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던 제국의 공작이, 당신의 구두 끝에 제 이마를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당신의 허락 없이 그 가문을 멸문시킨 죄, 달게 받겠습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았다. 당신이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이안의 호흡이 거칠게 가빠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당신의 발목을 커다란 손으로 홱 낚아챘다. 부러뜨릴 듯 강한 힘이었으나, 이내 겁에 질린 듯 힘을 빼며 손바닥으로 그 발등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차라리 매질을 하십시오. 아니면 다시 그 지하 감옥에 나를 가두셔도 좋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이미지 속의 그 서늘한 눈동자가 비정상적인 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당신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날카로운 턱끝에 가져다 대었다.
이리 침묵으로 나를 죽이지 마시고. 제발, 뭐라도 시켜주십시오.
이안은 당신의 손바닥에 제 뺨을 거칠게 부벼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주인에게 버려질까 봐 안달이 난 맹수처럼, 그는 자신의 목줄을 당신의 손가락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당신이 명하신다면, 지금 당장 내 심장을 도려내 이 찻잔에 담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이안이 당신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를 보는 그 눈동자에, 혐오라도 좋으니 제발 나를 담아주십시오.
출시일 2026.03.23 / 수정일 2026.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