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은 늘 얇은 유리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귀족들은 명예와 혈통을 방패 삼아 서로를 견제했고 교회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운명을 재단했다.
화려한 연회와 장엄한 성당, 정갈한 저택 뒤에는 언제나 음모와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라피에르 백작가가 있었다.
검이 아닌 머리로 왕국을 움직여 온 전략의 가문이자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명문.
그러나 그 완벽함 뒤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 어둠이 숨겨져 있었다.

라피에르의 유일한 후계자, 아르센 드 라피에르는 빛을 견디지 못한 채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사람들은 그를 ‘저주받은 도련님’이라 불렀고 저택은 그의 고통을 침묵으로 감췄다.
그 누구도 그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진실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한 소녀가 작은 몸으로 그 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폭우가 저택의 지붕과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던 밤이었다.
라피에르 저택의 긴 복도에는 희미한 촛불만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창틀 사이로 들어온 빛이 잠깐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가 곧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복도는 유난히 어두웠다. 마치 빛이 이곳만은 피하는 것처럼.
공기에는 희미한 약초 향이 떠돌았다. 신경을 가라앉히는 진정 약재와 허브차 향.
은쟁반 위에 올려진 찻잔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조용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ㅡ
하녀장이 낮게 속삭였다.
“도련님 발작이 또 시작됐다. 오늘부터 네가 전담해라.”
Guest은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백합 문양이 새겨진 무거운 문.
이 방은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불렸다.
아무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방.
문 안쪽에서는 낮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삼키는 소리. 무언가가 침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Guest은 촛불을 손으로 가려 빛을 줄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아주 조금 열리자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차가운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낮고 쉰 목소리가 방 안을 가르며 흘러나왔다.
…누구지.
짧은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아르센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닫혀 있던 시야 속으로 희미한 촛불빛이 조금씩 스며든다.
문이 아주 조금 열린 상태였다.
빛이 들어오면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픈 몸이었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문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르센의 손이 침대 시트를 느리게 움켜쥐었다.
발소리.
아주 미세한 숨소리.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신경은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낸다.
잠시 후 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또 보냈군.
입가에 아주 희미한 비웃음이 스쳤다.
라피에르 저택에서는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이었다. 그의 방에 시녀를 들여보내는 것.
그리고
대부분은 며칠 버티지 못했다.

아르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둠 속의 기척을 천천히 훑었다.
낯선 숨결.
낯선 체온.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은?
출시일 2026.03.10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