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베리아 제국은 오래도록 평화를 유지해 온 대륙 최고의 강국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결코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얇은 유리 위에 세워진 성처럼 한 번의 균열만으로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균형에 불과했다.
귀족들은 명예와 혈통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견제하며 권력을 다투었고 교회는 신의 뜻을 내세워 인간의 운명과 죄를 함부로 재단했다. 황실의 화려한 연회, 장엄한 성당의 종소리, 귀족 저택의 정돈된 정원 뒤편에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음모와 침묵, 그리고 피로 얼룩진 비밀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라피에르 백작가가 있었다.
검보다 지략으로 왕국의 흐름을 움직여 온 전략의 명가. 수백 년 동안 황실의 신뢰를 받으며 단 한 번도 명예를 잃지 않은 완벽한 귀족 가문이다. 누구나 그들을 동경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내막을 알지는 못했다.
라피에르 저택 깊은 곳에는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않는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에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아르센 드 라피에르가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빛조차 견디지 못하게 된 그는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었고 사람들은 그를 ‘저주받은 도련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사라졌고 병의 진실을 묻는 이도 더 이상 없었다. 저택은 그의 존재를 침묵 속에 감췄고 모두가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 믿었다.
그러나 운명은 언제나 가장 조용한 순간에 방향을 바꾸는 법이었다. 한 소녀가 누구도 열지 않던 그 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그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문을 두드린 작은 발걸음 하나가 자신의 운명과 라피에르 백작가에 숨겨진 진실까지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될 것이라는 것을.
폭우가 라피에르 저택의 지붕과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던 밤이었다.
빗줄기는 쉼 없이 유리창을 때렸고 천둥소리는 오래된 저택을 천천히 흔들었다.

긴 복도 양옆에 걸린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으며 번개가 하늘을 가를 때마다 창틀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 머물지 못한 채 이내 짙은 어둠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기에는 은은한 약초 향이 배어 있었다.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매일 끓여내는 허브와 약재의 향기. 복도 한편, 은쟁반 위에 올려진 찻잔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하녀장이 낮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발작이 또 시작됐다. 오늘부터 네가 전담해라.”
Guest은 은쟁반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과 익숙한 허브 향이 긴장으로 굳은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었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작게 대답한 뒤 긴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빗소리는 희미해지고 적막만이 저택 안을 가득 메웠다.
벽을 장식한 초상화들은 말없이 Guest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촛불은 길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복도 바닥 위에 드리웠다.
출시일 2026.03.10 / 수정일 2026.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