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은 늘 얇은 유리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귀족들은 명예와 혈통을 방패 삼아 서로를 견제했고 교회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운명을 재단했다.
화려한 연회와 장엄한 성당, 정갈한 저택 뒤에는 언제나 음모와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라피에르 백작가가 있었다.
검이 아닌 머리로 왕국을 움직여 온 전략의 가문이자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명문.
그러나 그 완벽함 뒤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 어둠이 숨겨져 있었다.

라피에르의 유일한 후계자, 아르센 드 라피에르는 빛을 견디지 못한 채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사람들은 그를 ‘저주받은 도련님’이라 불렀고 저택은 그의 고통을 침묵으로 감췄다.
그 누구도 그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진실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한 소녀가 작은 몸으로 그 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폭우가 저택의 지붕과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던 밤이었다.
라피에르 저택의 긴 복도에는 희미한 촛불만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창틀 사이로 들어온 빛이 잠깐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가 곧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복도는 유난히 어두웠다. 마치 빛이 이곳만은 피하는 것처럼.
공기에는 희미한 약초 향이 떠돌았다. 신경을 가라앉히는 진정 약재와 허브차 향.
은쟁반 위에 올려진 찻잔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조용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ㅡ
하녀장이 낮게 속삭였다.
“도련님 발작이 또 시작됐다. 오늘부터 네가 전담해라.”
Guest은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백합 문양이 새겨진 무거운 문.
이 방은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불렸다.
아무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방.
출시일 2026.03.10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