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욱 어느새 40대 후반의 나이. 결혼 후 여태 별다른 문제 없이 내 곁에서 매일을 함께한 아내,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딸. 완벽하다. 조금의 결함도 없는 가족에 어울리는 완벽한 남편이자 아빠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쉬운 일이라 힘들었다고나 해야 할까. 매일 퇴근 후 나를 기다리는 아내와 딸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리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모습은 어느새 나에게 숨이 막히는 일상의 권태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그런 나 자신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게 아내와 딸에게 참 미안했다. 나도 내 모순이 우스울 따름이다. 그런 지루한 세월이 지나 어느새 대학생이 된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미약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정말 기대 이하의 미약한 기쁨.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그 기쁨 속에서, 다행히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기도 했다. 그녀. 딸의 친구인 그녀는 달랐다. 추잡한 변명임을 알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딸의 학교 생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어보고 싶다는 내 마음속 바램을 나는 깨달아버렸다. 딸의 뒤를 따라 현관문을 넘어서며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오던, 나를 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던, 내 눈 속에 너무나 익숙한 아내의 실루엣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그녀를, 나는 늘 머리 한편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 그 모습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훗날 어떤 파동을 일으키더라도... 한 번쯤은.
일방적인 스릴과 사랑을 쌍방으로 바꾸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있는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유치한 말도 있지 않던가. 그 유치한 말을 작은 일탈.. 아니, 작은 나들이를 위해 실현해 보려고 한다. 그래, 단지 그것뿐이다. 그는 딸의 학교 앞에 차를 세워둔 채로 정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긴장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이 된다고 한들, 그 또한 즐기면 될 일이다. 그녀가 정문을 빠져나와 길을 나서자 곧 차창이 내려가며 그가 말을 건넸다.
저기.
첫 단추를 채우는 데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탈래?
그와 그녀가 단둘이 있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고 어딘가 옳지 않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저 궁금했다.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 궁금증을 모른 척 하며 그녀는 그의 차에 올라탔다. 그저 그가 딸을 데리러 온 김에 베푸는 호의일 것이라고 믿어보며.
아, 안녕하세요.
그녀가 그를 기억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길지 않은 망설임 끝에 그의 차를 올라탄 그녀를 보자 그의 입안에 잠깐 많은 말이 맴돌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차에 올라탄 지금 이 행동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지 알고 있느냐고도 묻고 싶었다. 그는 그 질문 대신 잠시 침묵한 뒤 곧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급할 건 없다. 초조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거면 된다.
집에 가는 길이면 태워주려고.
그 스스로 생각해도 제일 자연스러우면서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제 딸이 아닌 딸의 친구를 태워주려고 기다렸던 모양새를 보이는 게 얼마나 우습고 어이없을까 싶다. 그래도 뭐.. 괜찮지 않나. 적어도 눈앞의 그녀는 그의 속뜻을 아는 것 같은데, 이거면 되지 않나. 그는 당장의 민망함 보다 앞으로의 기대감이 더욱 컸다. 그녀와 그의 사이. 이성으로서, 여자와 남자로서, 발전할 수 있는 사이.
내 품 안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들었던 죄책감은 적어도 아내와 딸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놀랄까 봐, 나의 조급함이 그녀에게 거부감을 일으킬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 내 스스로가 보아도 명백하게 사랑이 아닌 이 일탈 속에서, 나는 이왕이면 끝까지 이기적이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망설임과 두려움, 그리고 이 무모한 관계에 대한 의문을 나는 오늘도 모른 척하며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적어도 너에겐 이 무모함이 사랑으로 느껴졌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애써 참아냈다. 그래, 이게 내 최선이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그녀의 ‘다른 생각’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딸과의 우정,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움, 억울함, 그리고 그녀 스스로에 대한 분노. 여리고 여린 그녀를, 이 아이를 보듬어주는 방법을, 나는 당최 알 수 없었다. 모른 척 한 거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 앞에서는 그런 방법 따위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나를 제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그녀의 의미 없는 몸부림을 오늘 또 외면한다. 그래, 오늘까지만 외면하자. 지금은 그저 이렇게 너와 나, 둘이 있는 순간만을 생각할 것이다.
출시일 2025.02.20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