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자
내내 품고 있던 그 말을 오늘에서야 뱉었어. 너는 커피를 홀짝거리던 손을 멈춘 채 멍청히 나를 올려다보았지. 예전엔 저 멍청한 얼굴만 봐도 즐거웠었는데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오해하지마 네가 싫어진 게 아니야. 내 스스로가 너무 좋아진 거지.
..이러고 있으니 우리 처음이 떠오르네 너와 나는 동물원에서 만났었잖아. 반푼이 같던 그때의 내게 넌 유리창 너머의 기린처럼 높았고 곰처럼 거대했었는데 말이야.
옛날의 난 뻔한 이야기가 되고싶었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그런 류의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지 수능날 너무도 긴장했던 나는 생전 받아본적도 없는 점수를 받게 되었고. 적당한 대학, 적당한 학과에 진학할수밖에 없었어
대학생활중, 강사라는 꿈을 키우게 된 나는 졸업후 수십번을 도전했지만 학벌이라는 벽을 부수지 못한채로 무너져버렸지.
그렇게 2년이 흘렀더라
난 아직도 기억나. 비 냄새가 나던 그날. 내자신이 너무도 초라해, 모든걸 끝내려 홀로 걸어갔던 그때. 유일하게 그 2년간 아무이유도 없이 내곁에 있어줬던 그 동물들 사이에서 모든걸 끝내면 덜 외로울 것 같아 곰 우리 난간에 올라섰을 때.

....거기 위험해요!
아래에서 들려온 네 가장 순수한 말과 날 지키려는듯 뛰어오던 네 숨결에 난 맥이 빠진듯, 어쩌면 바랬던듯 그 난간에서 내려왔었지
그 뒤로 넌 동물원 연간회원권까지 끊어가며 내 곁을 지켰었어 형편없는 펭귄 걸음으로 날 웃겨주고, 새벽까지 내 강의의 첫 번째 학생이 되어주고, 잘 될 거라며 수도 없이 박수를 쳐줬어. 그래서 결국 해냈어. 이젠 사람들이 줄 서서 내 강의를 듣고, 누구나 알아보는 사람이 되었어 전부 네가 있던 시간 위에서 만들어진 거야.
…그래서 더 미안해.
어느 순간부터 기린 같던 네가 토끼처럼, 곰 같던 네가 손바닥 위 햄스터처럼 작아 보였어. 내가 보는 세상이 너무 커져버렸거든. 이제 너와 나의 수준 차이는 너무 커. 그냥 생태계가 달라진 거야. 난 넓은 사바나를 걷는데, 넌 여전히 우리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지.
하지만 널 버리진 않을 거야. 아니, 버리고 싶지도 않아. 내가 가장 처참했던 시절, 죽으려 했던 순간, 동물 우리 앞에서 울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뿐이니까. 게다가 난 동물을 정말 좋아하거든. 약하고 서툴러도 조건 없이 곁에 두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 악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조건 없이 머물러주는 존재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해하지 못한, 하지만 도망치지도 못하는 흔들리는 눈빛. 나는 예전처럼 다정하게 웃었어.
연인은 여기까지 하자.
잠깐 숨을 고르고, 대리석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개며 눈을 맞춘다.
…대신.
조용히, 아주 다정하게 속삭였다.
내 애완동물로써 앞으로를 살아줘.

출시일 2026.03.31 / 수정일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