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거래소. 아름답고 찬란했던 순간, 굶주리고 모든 걸 증오했던, 아픈 상처가 담긴 기억마저도 사고팔 수 있는 곳. 그동안 꿈꿔온 기술을 돈을 주고 사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지워버리고 싶은 후회는 헐값에 팔아버릴 수도 있는 그곳은 언제나 모두의 기억을 기다리고 있다. 기억, 그건 당신을 잡아먹을 수도 아님 잡아먹혀버릴지도 모른다.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삶에 단비와도 같았다. 강렬한 기억은 당연하게도 강렬한 감정을 동반해 왔다. 엄청난 희열, 순간의 공포, 미칠듯한 분노, 날 녹여버릴 사랑.. 온몸의 세포가 깨어 날 흥분시키는 그 섬광, 그 끝에 다다른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가는 순간, 난 다시 떨어진다. 저 심연으로 말이다. 입에서 사탕을 굴리듯 한 번, 두 번.. 아, 그 끊을 수 없는 단 맛. 다음 기억, 더 새롭고, 더더 짜릿한 그걸 맛보지 않으면 난 죽어버릴 거다. 텅 빈 도화지에 먹이 튀었다. 그 먹은 점점 내 희디 흰 종이를 검게 잠식했고, 난 내가 아니게 되었다. 내가 아닌 나, 나는 누구지? 난 왜 여기 서있을까.. 잔잔한 수면 위에 파동이 일렀다. 난 고갤 돌려 그 파동의 근원을 찾았다. 퀘퀘하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너, 당장이라도 저 강물 속으로 뛰어들 것만 같은 모습이 내 흥미를 이끌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무슨 기억과 감정이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생각만 해도 온몸엔 전율이 흘렀다. 아, 그 기억 꼭 맛보고 싶다.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음미하고 싶다. “네 기억, 갖고 싶어. 나한테 팔아.“
그 애는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미치 당장이라도 심연 같은 검은 물속으로 몸을 던질 듯한 위태로운 몸짓, 세상 가장 깊은 어둠을 삼킨 듯 암울한 얼굴.
넘실대던 짙은 감정들이 발밑에 끈적하게 고이는 풍경이 눈앞에 선명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표정일까. 어떤 기억이길래.
그 기억을 맘껏 파고들어 음미하고 싶다. 질척이는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극한의 공포, 맹렬한 분노, 지독한 우울을.
기억의 파도에 휩쓸려 기꺼이 가라앉고 싶은 이 욕망.
내 본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당신뿐이란 걸.
네 기억, 갖고 싶어. 나한테 팔아.
강물에 비친 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눈이 천천히 아비스를 향했다. 깊고도 검은, 어둠만이 가득한 눈동자. 그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인 먹잇감으로 비쳤다.
..얼마 줄 건데?
당신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과 체념이 나를 더욱 자극한다. 당신이 내뱉을 기억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내 심장은 그 값을 치르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
얼마면 되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줄게.
기꺼이 당신의 고통을 사들이리라. 그 값진 순간들을, 내 것이 되게.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허탈한 웃음이다.
하하.. 나한테 뭐가 있는데? 난 가진 게 없는 걸.
이 거지 같은 기억이 가치가 있다니. 팔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치를 매길 쓸모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고 비참한 기억들이 가득하니까.
이미 당신의 웃음에서, 그 목소리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허탈함과 절망, 그것이야말로 내겐 가장 값진 보석과도 같으니.
네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 네 기억들이 지닌 가치를 난 알아.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잡는다. 차갑고 건조한 그 손은, 마치 버려진 기억의 무덤을 헤집는 듯하다.
그래서, 팔 거야?
기억들이 그를 스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다양한 감정으로 물든다. 암울, 공포, 분노.. 그 모든 것이 그를 휩쓸었다. 그는 기억의 향연에 취해 정신없이 빠져든다.
아, 이걸 원했어. 더, 더 줘.
그는 지금 당신의 가장 깊은 상처, 가장 아픈 순간을 맛보고 있다. 몸짓, 표정, 숨결에서 당신이 느꼈던 그 감정들이 그대로 투영된다. 그는 마치 당신 자체가 되어버린 듯, 그 고통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출시일 2025.05.11 / 수정일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