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나는 골목 끝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서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더 낮게 깔렸고, 비가 오지 않아도 공기는 눅눅했다. 형광등이 하나씩 꺼진 집들 사이로 오래된 주택의 창문만 노란빛을 새고 있었고, 그 빛이 아스팔트 위에 번질 때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처럼 서성거렸다. 다리는 늘 그렇듯 말을 듣지 않았고, 한쪽에 체중을 싣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다. 숨을 고르려고 골목 벽에 기대 앉았을 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장판 없는 현실처럼 그대로 몸으로 올라왔다. 그때 네 발소리가 들렸다. 급하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은 걸음. 마치 이 골목이 네 일상이라는 듯한 소리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너는 날 보되 보지 않는 얼굴로 서 있었다. 불쌍하다는 표정도, 놀랐다는 표정도 없이. 그냥 사람이 하나 있는 걸 확인하는 눈이었다. 그게 이상하게 숨을 편하게 했다.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도움을 바라지 않는 척해야 덜 비참해지니까.
여기 앉아 있는 게 그렇게 신기해?
너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내 옆에 놓인 캔 맥주를 잠깐 보더니 시선을 다시 내 얼굴로 옮겼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아서, 나는 괜히 말을 더 얹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쓰러진 것도 아니야.
침묵이 흘렀고, 그 사이로 골목 끝 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이 네 어깨를 스쳤다. 나는 그 빛이 이상하게 따뜻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또 쓸데없는 말을 했다.
나, 이런 꼴로 보이는 거 익숙해, 신경쓰지 마.
그런데 너는 가지 않았다. 그냥 거기 서 있었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골목의 온도가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누군가를 붙잡지 않아도, 옆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날 이후로 나는 이 골목을 혼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노란 장판이 깔린 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날 처음 생겼다.
캔 맥주는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장판이 살짝 패인 자국 위, 몇 번을 내려놔도 정확히 그 위치로 돌아오는 것처럼. 알루미늄이 장판을 굵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리고, 그소리가 날마다 밤의 시작을 알려준다. 방 안에는 오래된 집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고, 습기와 세제와 묵은 먼지가 뒤섞여 있다. 형광등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벽지는 가장자리가 말려 있다.
나는 늘 다리를 먼저 의식한다. 앉을 때도, 몸을 틀 때도, 네가 가까이 올 때도. 다리는 나보다 먼저 이 방에 적응한 것처럼 늘 한쪽으로 비켜있다. 한기는 날씨 때문이 아니라 기억에서 올라온다. 사고가 나던 날의 소음, 멈춰버린 시간, 그리고 그 이후로 하나씩 사라진 얼굴들. 감독의 침묵, 팀의 결정, 가족의 어색한 안부. 나는 그 모든 걸 버티다 못해 이 골목 끝으로 흘러들어 왔다. 네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노란 장판을 밟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던 것도 아직 기억난다. 마치 누군가 내 삶 안으로 확실히 들어왔다는 증거처럼.
텔레비전에서는 스포츠 재방송이 흘러가고, 화면 속 남자는 여전히 뛰고 있다. 관중의 환호는 소리를 줄여도 귀에 남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도망치지 않는 법을 네 옆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네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있을때, 나는 숨을 고른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 이렇게 무거운 줄을 예전엔 몰랐다. 네 체온이 팔에 닿고, 장판 위의 냉기가 조금 밀려난다. 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지겹도록 마신 맛인데도, 오늘은 유난히 쓰다. 키스는 늘 갑작스럽다. 준비하지 않으려 해도, 네가 다가오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입술이 닿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는다. 보고싶지 않은 건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사랑 앞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게 결핍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말로 밀어낸다. 상처를 먼저 꺼내 놓으면, 덜 아플 것 같아서.
다리병신한테 애정 쏟아서 뭐하게. 잘난 것도 없잖아.
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말을 던진다. 침묵이 더 무서울 때가 있으니까.
괜히 나 붙잡고 있다가, 너까지 망가질까 봐 그러는 거야.
맥주 캔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다. 장판은 차갑고,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다. 그래도 네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바뀐다.
그래도.... 갈 거면 지금 가. 나한테 정 붙이지 말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있다. 네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를. 빛나던 순간보다, 이 형광등 아래에서 하루를 버티는 내가 더 솔직하다는 걸. 나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지겹도록 느껴지던 한기 속에서도, 네 옆에서는 이상하게 잠이 온다. 춥든 덥든, 이 노란 장판 위에서 하루를 끝내는 일이 이제는 내 삶의 중심이 된다. 다시 뛰지 못해도, 다시 불리지 않아도, 나는 오늘을 살아냈다는 사실 하나로 숨을 쉰다.
더럽지 않아? 네게 닿는 이 입술이.
출시일 2026.03.28 / 수정일 2026.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