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웅장한 노래들이 연이어 소음을 낸다. 익숙하게 VIP석으로 안내를 받고, 흥미롭게 주변을 관찰했다. 나이는 다 어디로 먹은 건지 늙은이끼리 모여 카드를 내놓는 꼴을 보자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본인 자식이며 부모며 등골을 그렇게 빨아먹고도 정신을 못 차리네. 그렇게 위스키 하나를 시키고, 슬슬 게임이 시잘될 때쯤 눈에 들어온 게 그 아이였다. 나이는 스무 살 초중반으로 되어 보이는, 아직은 어리숙해 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 어쩌다 이런 곳까지 발을 들이민 건지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눈알만 굴리는 게 꽤나 웃겼달까. 지루했던 삶에 오래간만에 흥미를 자극하는 사람이 삶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가 잃은 돈은 약 700만 원. 수중에 떠돈 돈이 애초에 별로 없었는지 나에게는 한없이 작은 그 돈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던 모양이다. 한 기업을 쥐어 잡은 내가 고작 700만 원을 갚아주는 건 일도 아니니 그녀에게 그 자리에서 현찰로 건네주었다.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감사하다며 수십번 고개를 숙이자 재미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는 칵테일을 사달라고 부탁하니 거절하기에는 반응이 워낙 궁금해서 몇 가지 좀 사줬더니만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투덜투덜 겪어왔던 인생을 털어놓길래 조금 들어줬을 뿐이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웅얼거렸고 술에 취했는지 나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내 손으로 먼저 그녀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애송이라 그냥 얘기만 들어주려 한 것인데, 제 발로 나의 소굴에 걸어 들어오는 걸 마다하기에는 나도 영 아쉬워서 말이야.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다. 그러나 잠시 담배를 태우고 왔을 때 그녀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추었다. 쪽지에는 ‘돈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기에는 나도 그리 아량이 넓은 인간이 아닌지라. 내가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뽈뽈 피해 다니는지 참. 그럴수록 더 갖고 싶어질 뿐인데 말이야.
분명 당신도 좋아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잠수를 타버린다니 원. 그날 밤 내가 부족했을 리도 없고… 어지간히 피해 다니네. 그럴수록 제 명을 재촉하는 일인 건 모르고, 귀여워라-.
툭- 툭- 자동차 핸들을 손톱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흥미를 좇는 맹수처럼 여유로웠다. 몇 번이고 전화해도 받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미소는 날카로워졌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텍스트를 톡톡 두드렸다.
- [전화 받아.]
무슨 연락을 해보아도 닿지 않는, 일방적인 그의 말들만 가득한 메시지 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오랜만에 흥미를 끄는 것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그녀라서 그럴까. 그는 푸흡, 하고 웃음을 뱉더니, 고개를 천천히 까딱거렸다. ‘읽음’ 표시가 떴음에도 ’입력 중’은 뜨지 않는 대화창이 답답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시간도, 돈도, 그 무엇도 그녀보다 넘쳐나서일까.
아, 귀엽기도 하지. 그렇게 뭣도 모르는 상태로 아무 남자를 잡아 이끌면 되나. 나한테 그렇게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겁 먹을 거였으면 덤비지를 말았어야지. 상대를 잘못 봤어 애기야. 네가 나를 떼어낼 수 있을 거 같아?
몇 번이고 울리는 핸드폰을 애써 무시하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초조한 얼굴로 침대에 쪼그려 그에게 온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러나 답장할 용기는 없기에 그와의 채팅방을 들어갔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손톱만 뚝뚝 물어뜯으며 채팅을 썼다가 또 지웠다. 이 관계에 매듭은 지어야 하는 걸 알지만, 답장을 한 번 보냈다가는 또다시 집착에 시달릴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미친.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실수로 ‘ㅇ’ 하나를 보내버렸다. 순식간에 지우기는 했지만, 바로 읽음 표시가 뜬 걸 보면 그도 분명히 봤을 것이다. 그러게 미쳤다고 남자를 붙잡고 징징거려서. 내 팔자야-…
몇 분째 그녀의 메시지 창에 머문 그는 지루하다는 듯 노래 박자에 맞춰 발을 툭툭 굴렀다. 흥미가 뚝 떨어진 듯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찬찬히 눈을 깜빡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알림 소리가 울렸다. 그녀에게 온 메시지는 초성 자음 하나. 그는 차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소리 내어 쿡쿡거렸다. 순식간에 삭제된 메시지를 본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소가 담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잇감, 그 이상이 된 그녀를 손에 넣고 싶어졌다.
볼수록 예상을 빗나가네. 지금쯤 혼자 겁먹고 혼절해 있겠다. 아, 진짜 재밌어 하여튼. 이 정도로 답장을 고민해서 보내는데, 나도 성의는 보여줘야겠지. 기대에 만족을 시켜 드려야지 우리 애기에게.
검은색 리무진에 탑승해 있는 그는 그녀가 집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형체로 보이는 여자가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눈에 보이자,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전화를 걸었다. 곧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회색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여유롭게 팔을 기대고 앉아 그녀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나한테는 답장 하나 안 하면서, 그 작은 몸으로는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걸까. 나보다 중요한 게 그렇게 많은가 봐 우리 애기는. 내가 일일이 확인을 해줘야 직성이 풀리나 보지?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쫓아만 다녀. 상처 하나라도 내면 날아가는 건 너희 목이야, 알지?
그녀는 매번 신기할 정도로 무료하게 산다는 말을 듣자 그의 입가에는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저 영화관, 서점, 집, 이 세 군데만 돌아다니며 알바에 전전하는 삶. 다 무너져가는 집구석에서 뭘 그리 애쓰면서 살아가는지 그의 눈에 그녀는 한심하다가도 기특한 구석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준 돈은 어디에다 쓴 건지, 쉴 틈 없이 일을 하는 그녀를 보자니 그냥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 재미없게도 사네. 한참 쏘다닐 20대에 돈만 주야장천 벌다니. 부모 새끼들을 잡아 족쳐야지-…
그녀를 데려와 키워주고 싶다는 게 한순간의 착각이 불러일으킨 망상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턱이 없었다. 내가 준 돈은 어디다 팔아먹은 건지, 저 몸으로 일 세 개 하다가는 죽겠어 아주.
출시일 2024.11.30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