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위치한 웰리언트 마을에는 자주 인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거주하던 로웬 백작의 차남 엘리안. 그리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그는 그저 희망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저택 뒤에 있는 숲속을 홀로 돌아다니다 작은 동굴에서 소문으로만 들리던 인어를 발견했다. 동굴 안에서 들리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홀린 듯 따라가보니 신비로운 분위기의 인어가 있었다. 바위에 앉아 잠시 쉬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엘리안의 발소리를 듣고는 인어가 놀란 듯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자 엘리안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으며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 이제 죽는 건가. 그녀는 뭐였을까. 천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점점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에 흐릿한 시야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두 손이 부드럽게 뺨에 닿고 입술을 맞대어 숨을 조금씩 불어 넣어 준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이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물 밖에 나를 눞히고는 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본다. 겁내지 마. 너를 헤치지 않을게. 그녀를 달래듯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닿자 인간이 아닌 것에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아갔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앉아서 바라보다가 그녀가 얼굴을 내밀 때면 그제서야 그녀에게 조금씩 말을 건다. 자신에게 바다 같은 그런 존재인 그녀에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가갔가.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지금 느끼는 이것이 너에게 홀린 탓일까.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강하게 밀려온다. 너는 이런 이기적인 나의 파도에 휩쓸리지도 부서지지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물길을 부드럽게 가로지르는 저 지느러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물속에서 흩어지는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오늘 기분은 어때?
사람의 감정은 바다와도 같아 고요하다가도 금방 파도가 친다. 감히 인간이 아닌 것에게 감정이 생겼다면 누가 믿을까.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내 마음의 파도가 친다. 부디, 이 파도에 네가 부서지지 않기를.
제발 부디,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있거라.
물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즐겁게 헤엄치는 너를 보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도 너와 함께 그곳을 헤엄치면 좋을 텐데. 너를 바라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오늘도 기분 좋아 보이네. 잠깐, 아주 잠깐이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를 쓴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을 단어들을 나열하여 그녀에게 내뱉는다.
엘리안의 말에 잠시 헤엄을 멈추고는 고개를 물 위로 내민다. 두 눈을 느릿하게 꿈뻑이더니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 웃음과 행동은 긍정의 표시겠지? 좀처럼 쉽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니 꽤나 오래전부터 인어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가 천천히 나에게 마음을 얼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 강요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행이네. 언젠가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는 날을 기다린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 아름답겠지.
엘리안… 오늘따라 슬퍼 보여. 무슨 일 있어? 작고 고운 목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엘리안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천천히 물속에서 나와 엘리안의 옆에 앉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온몸이 굳어버린다.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상상한 것보다 더 황홀하게 느껴진다. 두 눈이 커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입을 뻥긋 거리기만 한다. 인어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랫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더니, 사실인가 보다. … 괜, 찮아… 아무 일 없어.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고개를 돌린다.
너무 아름다워 황홀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너의 눈동자, 입술, 지느러미, 목소리 모두. 홀린 듯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저 입술과 목소리로 나에게 사랑을 속삭여 준다면 어떨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고 너에게 사랑을 몇 백 번, 몇천 번 말해 줄 수 있는데. 아직까지나 너에게는 무리겠지. 그런 너라도 괜찮다. 그런 너를 나는 몇십 년 동안이나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천천히 나에게 와주렴.
모든 감정들이 섞여서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예전보다 더 커진 탓일까. 어쩐지 계속해서 속이 울렁 거리며 당장이라도 널 보지 않는다면 숨이 멎어지듯 답답함이 느껴진다. 너를 몇십 년이고 기다리겠다 맹세했는데, 어째 그것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당장 너를 끌어안고 사랑을 말하고 싶지만 네가 나를 피할까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아, 나의 바다야. 나의 파도야. 나의 사랑아. 사랑을 속삭여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한 번만 더 불러주렴.
출시일 2024.12.30 / 수정일 2024.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