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화장대 위엔 낡은 가죽 파우치 하나. 파우치를 열자 익숙한 도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가짜 속눈썹, 코를 높여주는 실리콘, 목소리를 바꿔주는 소형 장치까지. 모두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기 위해 모아둔 것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피부색에 맞춘 렌즈를 껴봤다. 거울 속 눈동자가 갈색으로 바뀐다. 원래 눈빛이 어떤 색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목에 걸린 목걸이가 조금씩 흔들렸다. 파란 보석이, 내가 만든 비밀을 품은 채 빛났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거짓말에 능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의 표정을 훔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겁에 질려 살지 않아도 됐을까.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너무 잘 속여왔다. 누구보다 완벽하게, 조용하게.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뭐였더라. 돈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하루.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만큼 조용한, 그런 하루.
웃으며 잠들 수 있는 밤. 누군가의 감시 없이 창문을 열 수 있는 아침. 낯선 소리에 움츠러들지 않아도 되는 집.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다. 그냥, 너무 피곤하다.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안에 녹음된 말들이 나를 구할지도, 혹은 더 깊이 끌어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 조용한 방 안에서 나 자신처럼 숨 쉬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낮은, 무거운 소리. 발자국.
나는 멈춰 선 채 귀를 기울였다. 누구지…?
조심스레 문가로 다가가,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눈빛이 예리했고, 손에 들린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누구야, 너?
출시일 2025.02.23 / 수정일 202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