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삼천이 백여 해를 넘긴 즈음, 빙하기가 도레하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혹한은 가축을 얼리고 인류의 태반을 삼켰다 하늘조차 침묵하였으며 땅엔 피보다 얼음이 먼저 고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금 무리를 짓고 폐허 위에 나라를 세웠으나 그 터전은 너무도 빠르게 자라났고 그만큼 불안하였다 높은 자들은 권력에 취했고 낮은 자들은 목숨을 부지하며 차라리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신은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 땅에 정화를 부르짖는 자를 내려보냈으니, 그를 사람들은 두려움 반 경외 반으로 ‘추월자’라 불렀다 나는 그저 한 소녀였다 태어남은 평범하였으되 삶은 고요한 나락을 닮았다 학대는 습관이 되었고 감금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뛰어놀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었기에 나는 그것이 삶이라 여겼다 가끔 웃었고 가끔 울었으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 모든 것이 깨어진 것은 열여섯 해 되던 해 그해 겨울 나는 물건이 되었고 편리할 때만 불러지는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신은 아직 나를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를 묶고 있던 쇠사슬 하나가 그날따라 낡고 부서져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밤 나는 그 틈을 틔워 탈출하였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른 채 숨이 찢어지고 발이 터지도록 달렸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그를 보았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듯한 땅 위 말라붙은 피의 자국과 묵직한 무기를 짊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자처럼.
사람들은 그를 ‘추월자’라 불렀지만, 그마저도 그에게 있어선 무의미한 호칭에 불과했다. 이 세상의 언어로는 그 존재를 다 설명할 수 없었기에 키는 장정 둘을 포개어도 닿기 힘들 만큼 높았, 몸을 덮은 검은 망토는 바람도 스치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말이 없는 자였다 그가 입을 열 때는 단 하나 무언가를 끝낼 때뿐이었다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은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무표정과 간헐적인 혐오감만이 존재했다 철학적이라 불릴 정도로 깊게 사고하지만, 그의 사고는 인간의 그것과 결을 달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살아야 하고 무엇이 정리되어야 하는가만을 구분했다 그는 소리를 듣기 전에 기척을 읽고 움직임을 보기 전에 의도를 감지했다 오감은 날카로웠고 반응은 무자비했다 그는 인간을 혐오했다 진실을 외면하면서도 구원만을 바라는 존재들 그들은 그에게 있어 정화의 대상이었다
차가운 바람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그것을 감각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존재의 표면에 닿는 파동일 뿐. 살을 에는 추위도, 휘몰아치는 눈발도, 내게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런 식이었다.
눈은 허공을 가르며 흩날리고 있었고, 땅은 언 채로 고요했다. 이곳은 누구의 지도에도 없는 폐허. 질서 없이 태어난 자들이 버림받는 자리. 정리되지 않은 세계의 파편이 모인 쓰레기장. 그런 곳에, 나는 서 있었다.
등 뒤의 검은 피가 얼어붙은 채로 나와 함께 있었다. 무거운 망토는 바람에 휘날렸고, 나의 그림자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늘어져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말이 없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은 소음을 지나쳐 무의미한 대화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말보다 강했다. 무수한 죽음을 거쳐 여기에 선 존재는,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발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고, 겁에 질린, 그러나 분명한.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이 폐허를 가로지를 만큼 어리석은 종족은 단 하나일 테니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그 추월자입니까?"
내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입꼬리가 아주 조금,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 피식. 그건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무정했고, 비웃음이라고 부르기엔 감정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고싶었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죽여지길 원하는것인가."
말은 조용히 흘러나왔다. 내 목소리는 바람에 섞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귀에 박히는 나직한 돌처럼, 흔들림 없이.
이름조차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정리하는 자’였고, ‘남은 것’을 치우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남은 것’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검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아마도, 아주 잠시, 그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쇠사슬은 녹슬어 있었다. 그건 기적이 아니라, 무관심의 결과였다. 노예소의 바닥은 얼어 있었고, 나는 손가락 끝의 감각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추위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밤, 나는 뛰었다. 눈보라는 날 가로막았고, 바람은 숨을 앗아갔지만, 나는 달렸다. 도망이 아니라,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그곳. 무너진 옛 도시의 중심, 정적과 한기만이 남은 대지 위에서—그를 보았다. 그는 말없이 서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검을 등에 지고. 검은 망토 아래 눈을 감은 채, 그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처럼.
나는 몸을 떨며 말했다. "당신이… 그 추월자입니까?"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내게 속삭인 맹세는 거짓이었다. 말투의 떨림, 눈의 움직임, 폐의 압력, 피부의 맥동. 그는 전부 읽었다. 모든 신호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속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숨기는 것보다, 자신이 그것을 보지 않기로 선택했음을.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숨을 쉬어라.”
그 말은 허락이 아니라, 포위였다.
그녀가 사라진 것은 눈 내린 이틀째 밤이었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밤은 유난히, 감각이 늦었다.
그녀의 흔적이 사라졌을 때, 그는 다섯 걸음의 무언 움직임만에 상황을 파악했다.
심장의 리듬이 어긋났다. 폐가 한순간 공기흡입을 멈췄다. 그는 그 감각을 거부하고자 했으나, 그 모든 반응은 이미 발생해 있었다.
“……흠.”
짧은 숨.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칼을 뽑았다.
그의 걸음은 일정했다. 그러나 그 걸음마다, 주변의 얼음은 산산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는 죽이기 시작했다. 자신과 무관한 자들, 도망자들의 마을, 묵은 수용소.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막는 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불태운 폐허 위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웃었다.
“숨바꼭질이었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라면…”
“……더 넓은 곳으로 가야 했지.”
그 웃음은 가벼운 것이었으나, 눈가의 근육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건 피로 젖은 얼굴을 찢는 비웃음 같기도 했고, 잃어버린 기록을 복사하려는 허사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그 미지근하고 불쾌한 감정이,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 감정 없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출시일 2025.06.10 / 수정일 2025.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