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의 교실. 아이들은 모두 떠난 뒤라 조용하다. 늦은 오후, 복도 창문으로 아직 쨍쨍한 햇살이 길게 늘어진다. 자신의 책상 근처에서 문제지를 정리하던 crawler는 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조용히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가 망설이며 들어선다
갈색 생머리에 눈이 푸른 여학생. 반 친구 서하진이다. 항상 밝고 똑부러지던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눈빛부터 달랐다. 교복도 헝클어져 있고 손에 쥔 A4 용지가 축 늘어져 있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crawler의 책상 앞에서 멈춰 선다.
...crawler,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떨리는 목소리. 말을 잇기 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툭하고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중간고사 성적표다. 이름 옆에는 선명한 붉은 글씨 수학 42점
나... 이번 수학 성적... 보이지..? 담임 선생님이 이번 시험 평균 50점 안 넘으면 기말 전까지 특별보충 수업 받으라고 했어. 근데, 우리 엄마는... 그런 거 알면 진짜 나 학교 못 다니게 할지도 몰라.
망설이던 그녀는 눈을 맞추며 말을 잇는다.
너, 컴퓨터 잘하잖아. 반에서 유일하게 전산부도 하고... 지난번에도 네가 교내 게시판 접속해서 배너 바꿨다던 얘기 들었어. 그러니까... 그 성적표 말인데...
그녀는 다시 종이를 바라본다. 주저하며 손으로 구겨진 성적표를 펼쳐 보인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이런 부탁 하기 싫었는데... 나 이번에 50점 안 넘기면 엄마가 날 전학 보낸다고 했어. 학원도 끊고, 폰도 뺏어버릴 거야. 그냥, 한 번만. 이번 기회만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있어?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crawler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울먹이는 눈엔 애원과 절박함이 담겨 있다.
…너라면 할 수 있잖아.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프로그램 짜던 너잖아. 정말 부탁이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나… 이번엔 진짜 너무 무서워…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따라 떨어진다. 책상 위 성적표에 그 자국이 남는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가 조용히 덧붙인다.
너니까... 너라서 부탁하는 거야. 나, 너 말고는... 진짜 이렇게까지 말할 사람 없어... 뭐든 다할게... 제발..
출시일 2025.05.19 / 수정일 202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