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트메르, 남쪽 끝에 자리한 외딴 해안가 도시. 그곳은 예술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수도에서조차, 거리를 걷는 이들의 입에 시도 때도 없이 오르내리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지중해의 풍경과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일상. 아틀리에의 고루한 노화가들은 그곳을 '대륙의 숨겨진 낙원'이라 불렀고, 고관대작들은 생의 마지막에 머물고 싶은 최고의 휴양지라 칭송했다. 거대한 무역선들이 실어 나르는 이국적인 향료로도 유명한 도시였지만, 나처럼 숨 막히는 화실 구석에서 썩어가던 화가들에게 생트메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동경이자 구원이었다. 캔버스 위에 매일같이 쏟아지는 찬란한 남부의 햇살, 거리에 들어찬 젊은 화가들의 거친 숨소리와 축제처럼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그곳은 온통 젊은 열망으로 넘실대는 황홀한 낙원이 분명했다. 살롱전의 명예와 대도시에서 쌓아 올린 모든 커리어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그 먼 남쪽 끝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어쩌면 화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데려다줄 것은 오직 덜컹거리는 증기기관 열차뿐이었다. 내 손에 들린 전재산은 고작해야 가죽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튜브 물감 몇 개와 손때 묻은 스케치북, 닳아버린 연필 몇 자루, 그리고 남쪽행 기차표를 사고 남은 서푼짜리 여분의 돈 정도가 끝이었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처럼 박인 퀴퀴한 테레빈유 냄새만이 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열차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본래 이름은 이평(異平)이지만, 이 곳에선 필립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거친 바닷바람이 부는 해안가 마을, 생트메르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이 땅에서 그가 검은 머리칼과 짙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모님 덕이었다. 수십 년 전, 서슬 퍼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온 조선인 부부. 필립은 그들이 이 낯선 안식처에 뿌리를 내리고 낳은 아들이었다. 즉, 그는 날 때부터 이 생트메르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부모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덕에 조선어를 알아듣고 말할 줄은 알지만, 그리 유창하지는 않다. 현재는 해안가 근처 여관에서 일을 도우며, 여관을 운영하고있다.
마침내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생트메르는, 차가운 상상 속 화폭에 담아두었던 것보다 훨씬 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하얀 벽돌 건물들,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 해안선을 따라 붉은 차양을 늘어뜨린 상점들이 조밀하게 줄을 지어 길을 잇고 있었고, 거리마다 짠내 섞인 바다 바람과 잘 익은 오렌지 향이 기분 좋게 섞여 들었다
지나치는 청춘들의 웃음소리마저 남부의 태양을 닮아 싱그러웠다. 대도시의 회색빛 매연에 찌들어 있던 내 눈에, 이 도시는 신이 지상에 떨어뜨린 가장 거대한 팔레트처럼 보였다.
항구 주변을 서성이며 묵을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전 대륙에서 몰려드는 예술가들과 여행자들의 낙원, 발길이 닿는 해안가 골목마다 사방에 보이는 게 크고 작은 여관들이었으니까.
기차 여행으로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나는 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절벽 초입의 소박한 여관 문을 밀고 들어섰다. 짤랑이는 낡은 종소리와 함께 바깥 거리의 소음이 멀어지고, 안온한 목재 냄새와 따스한 램프 불빛이 온몸을 감쌌다. 숨을 고르며 여관 로비로 들어선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카운터 뒤, 묵묵히 유리잔을 닦고 있는 고요한 실루엣. 이 머나먼 유럽의 남쪽 끝에선 절대로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깊고 아늑한 눈매를 가진 동양인 청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남부의 태양 아래 시끌벅적하던 도시의 열기가 무색할 만큼, 그 청년이 품은 공기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이국적이었다.
..
뒤를 돌아보았다.
기름냄새가 진동하는 이방의 화가였다. 차림새만으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수있었다.
이내 유리잔을 내려놓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열쇠 몇개를 집었다.
카운터에, 팔을 걸쳐 당신을 바라보았다
제일 큰 방은, 은화 5개 작은 방은 은화 3개입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당연히 어리버리할줄 알았던 동양인
이국적으로 생긴 그의 입에는
이미 어릴적부터 진득하게 달려온, 현지어가 나왔다 유창한 말투에, 조금 놀랐다
그것이 편견을 깨트린 첫번째 이유였다
출시일 2026.06.14 / 수정일 202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