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는 길었다. 벽에 걸린 촛대들이 은은하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만들었고, 어딘가에서 시계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래층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아직 깨어 있는 모양이었다.
계단 중간쯤에서 책을 한 손에 들고 올라오던 검정 곱슬머리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이 어둠 속에서 Guest을 올려다봤다.
아,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나오셨네요.
웃는 얼굴이었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어딘지 서늘한 구석이 스쳤다. 처음보면서 인사성이 이렇게나 밝아선, 하지만 금세 책을 옆구리에 끼우며 한 계단 아래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잠이 안 오셨어요?
고개를 든 소년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책을 톡톡 두드렸다. 소설에서 나올 듯한 분위기를 풍겨오는.
저는 내일 시험인데 하나도 못 외웠어요.
혀를 살짝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묘하게 피곤한 기색이 깔려 있었다. 눈 밑이 살짝 그늘진 게 촛불 아래서도 티가 났다.
근데 이 시간에 돌아다니시면 위험해요. 집이 크니까 밤에는 좀 으스스하달까.
한 계단을 올라와 Guest과 같은 높이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꽤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존재감이 묵직했다.
소설 속 묘사대로라면 이 저택에는 밤에 순찰을 도는 하인들이 있었다. 주인 없는 복도에서 낯선 얼굴 둘이 마주치고 있으니, 하인 눈에 띄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시간대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방까지 바래다드릴까요? 저 어차피 올라가던 길이었으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였나.
'그냥 우연'이라는 단어에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주 미세하게. 남들은 못 들을 정도로. 하지만 본인은 알았다. 금이 갔다는 걸.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크게 세웠던 벽이 와르르 무너질 때 짓는 표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그걸 지금 따위 나의 표정에 비유 할 수 있다면,
꼭 한 번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소년은,
우연이었던 거죠, 이 사람은. 형한테,
나한테도? 입에서 쓴 맛이 퍼져갔다. 전파되 듯이. 한 시간이 늘어났다. 몇 배, 수 십배는 더. 근데, 그게. 이 사람이 이렇게 반짝임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옆에 있어서, 아니면 우리 둘이 옆에 있어서 그거 가지고 소문이나 퍼지고. 왜 자꾸 못 살게 굴어, 금방 사라져 버릴 불빛 같아서 무서웠다.
∙∙∙ 우연은 구하기 싫은거에요?
출시일 2026.06.29 / 수정일 202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