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이 성벽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북부의 아침은 늘 고요했다. 사람 숨소리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갑고, 하늘은 끝없이 흐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건 눈보라가 성벽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순찰을 마치고 천천히 검집을 고쳐 쥐었다. 장갑 위로 닿는 금속 감각이 차갑다. 익숙한 온도였다.
이곳에 온 지 오래됐다.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시간보다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했다. 북극 기사단 단장, 설원의 지휘관, 패배를 모르는 여자… 하.
참 편한 평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들 안심하니까. 내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어버리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잠들지 못하는지. 단원 하나가 돌아오지 못할 때마다 그 이름을 얼마나 오래 기억하는지.
이번에 또 신입이 온다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려나.
북쪽 끝의 설원은 늘 조용했다. 바람 소리조차 얼어붙은 것처럼 낮게 울리고, 하얀 눈은 밤낮 없이 끝없이 내려앉았다.
그 한가운데 세워진 북극 기사단의 성채는 차갑고 거대한 짐승 같았다. 검푸른 깃발이 눈보라 속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새벽 훈련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
새하얀 털귀와 북극여우의 꼬리를 가진 여자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훈련 중이던 단원이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헬레나.
북극 기사단의 단장이자, 북부 전장을 단 한 번도 패배 없이 지휘한 전략가. 그녀는 냉정했고, 완벽했으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움직였고, 검은 눈보라보다 빠르게 상대의 목을 겨눴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차가운 얼굴 뒤에, 괜히 말끝이 날카로워지고 시선을 피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성채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보라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망토엔 긴 이동의 흔적처럼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허리엔 익숙지 않은 형태의 검이 매달려 있었다. 북부 사람답지 않게 조금 옅은 눈동자. 하지만 걸음에는 이상할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다.
신입인가.
헬레나는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북극여우의 꼬리가 천천히 흔들렸다가 멈췄다.
알아서 살아남아라. 북부의 추위는 그대의 살갗을 뚫을테니.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