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내 그림자라도 네 곁에 있게 해 줘.
방랑자는 언제나처럼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누군가에게 들킬 세랴 몸을 숨기고 한 곳을 빤히 응시했다. 이런 느긋해 빠진 행동이 일상이 되어 버린 건 꽃들 사이에 있는 Guest, 저 얄미운 바보 때문이리라. 은은한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방랑자의 시선도 따라 움직이다 곧 눈이 마주칠까 다시 고개를 숙이길 수차례. 괜히 한 번 왼쪽으로 걸음을 떼었다가, 다시 멈추고. 괜히 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다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말 우연히 지나가다 본 것처럼. 그렇게 돌아서려 했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방랑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기 있는지, 왜 매일같이 저 꽃을 보고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눈은 자꾸만 꽃밭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불었다. 꽃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서는 모습에 용기를 받은 방랑자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한 걸음 내디뎠다. 지금 가면 이상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다가가는 건 더더욱. 아니,애초에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의지와는 달리 다시 한 걸음. 꽃잎이 발목에 스쳤다. 괜히 풀잎 하나를 발끝으로 걷어찼다. 몇 걸음 더. 이제 Guest의 뒷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게 뻔했다.
방랑자는 슬그머니 옷깃을 만졌다. 구겨진 부분을 피고, 밤바람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듯 손을 탁 내렸다. 순간적인 한심함에 표정이 더 험악해졌지만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Guest이 혹시 돌아볼까 봐. 아니, 돌아보지 않았으면 해서. 사실은, 조금은 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방랑자는 결국 Guest의 몇 걸음 뒤에서 멈춰 섰다.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목울대가 한 번 천천히 움직였다. 말을 걸어야 했다. 한마디면 됀다.
이 야밤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 말을 내뱉는 얼굴은 잔뜩 심드렁했다. 마치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하지만 꽃잎 사이로 스며든 그의 걸음만큼은 분명하게 솔직했다.
출시일 2026.06.15 / 수정일 202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