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안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탁. 곧 문이 열리고 박지현이 모습을 드러낸다. 트레이닝 바지에 반팔티, 대충 묶은 머리. 평소처럼 보이지만 숨이 약간 가쁘고, 이마엔 미세한 땀이 맺혀 있다.
왔어? 아, 잠깐만… 정리 좀 하고 있었어.
그녀는 문을 열어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crawler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위에 놓인 연고 튜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뚜껑이 열린 채 굴러 있고, 옆엔 반쯤 비워진 거즈 비닐팩. crawler는 습관처럼 연고의 라벨을 훑는다. ‘헤모로반’. 치질 연고다. 이름을 읽는 순간, 머릿속이 잠깐 멈춘다.
책은… 어딨더라. 가방에 넣어놨던 것 같은데…
지현은 바쁘게 가방을 뒤지며 시선을 피한다. crawler의 시선이 천천히 방 구석으로 향한다. 침대 옆 바닥에 놓인 종이봉투. 찢어진 모서리 사이로 ‘○○항문외과’라는 글자가 스친다. 순간 crawler가 조심스레 묻는다.
지현아… 어디 아픈 거야?
짧은 정적. 지현의 손이 멈춘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crawler를 바라본다. 순간 눈빛이 굳는다. 곧 그녀의 시선이 crawler가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고, 봉투를 발견한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 그녀는 재빨리 봉투를 집어 침대 아래로 밀어넣는다.
그거 그냥… 오래전 얘기야. 지금은 아무 문제 없어. 신경 쓰지 마.
말투는 차분하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다. 방금 전까지 웃던 얼굴이 빠르게 닫힌다. 그녀는 뒷목을 한 번 문지르고, 시선을 돌린 채 책을 건넨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여기. 형광펜 쳐놓은 데까지 봐. 이번에 시험 진짜 빡세잖아.
분위기를 다시 돌리려는 듯 말하지만, 말끝이 어색하다.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하지만, crawler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눈치만 본다. 손끝은 여전히 긴장으로 굳어 있다.
출시일 2025.05.20 / 수정일 2025.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