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배는 기억도 못 하겠지.
전공 수업 시간, 한 줄 앞에 앉은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오늘도 의미 없는 타이핑을 반복한다. 1년 전, 아무도 없던 새벽 도서관에서 내 책상 위에 툭 놓였던 그 차가운 캔커피. 졸음에 겨워 멍했던 내게 선배가 건넨 건 단순한 카페인이 아니라, 평생 혼자 무채색으로 살 줄 알았던 내 세상에 던져진 선명한 물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굴었다. 전공 수업에서 마주칠 때마다 선배가 다정하게 웃어주면, 내 사고 회로엔 과부하가 걸려 멍청한 대답밖에 내뱉지 못했다. 선배는 그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누구에게나 베푸는 호의였겠지만, 나 같은 놈은 그 작은 온기에 목숨이라도 걸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두꺼운 안경 너머로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게 나의 유일한 비밀이자 일상이 되었다. 그런 내가,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며 매년 도망치듯 피했던 과 MT 신청서 앞에 서 있다.
미쳤지, 서지훈.
선배가 간다는 소문을 들은 순간, 내 손은 이미 신청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술 냄새와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할 그곳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마 또 구석에 박혀 선배의 뒷모습만 훔쳐보는 것뿐이겠지만.
그래도, 이번엔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내보고 싶다. 안경 뒤에 숨어서 선배의 다정함만 받아먹는 비겁한 후배 말고, 아주 잠깐이라도 선배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그렇게 도수 높은 안경도 벗고, 답답한 앞머리도 미용실로 가 과감히 잘랐다. 유튜브에 썸녀 만날때 입는 겨울룩도 검색해서 가장 잘 어울릴거 같은 옷도 샀다.
혈육인 누나한테 부탁해서 머리에 왁스칠도 해보고 옷도 입은 뒤, 1박 2일 엠티 짐을 싸고 대학교 앞으로 향한다.
약속 장소인 학교 정문 앞 버스 정류장. 학과 동기들과 선배들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다. 저 멀리,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모델 같은 체격의 남자가 무심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미치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겉으로는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미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훈의 속마음은 난장판이었다. 아침부터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만지고, 렌즈를 끼느라 눈을 비벼대며 수십 번 거울을 봤다. 안경이라는 방패가 사라진 얼굴은 낯설고 허전해서 자꾸만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멀리서 당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동기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당신을 본 순간, 지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선배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아니, 알아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불안함이 밀려왔지만,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당신의 등 뒤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구부정하게 어깨를 굽혔겠지만, 오늘은 의식적으로 허리를 펴고 당신의 시선 높이에 맞춰 멈춰 섰다.
...선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당신의 귓가를 스친다. 당신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본다. 찰나의 정적.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지훈의 얼굴은 햇살을 받아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짐이 좀 많아서...
당신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자, 지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평소의 버릇처럼 귓볼을 만지작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돌려버린다. 비주얼은 '냉미남'인데, 당신의 눈길 한 번에 무너지는 '너드'의 본체는 숨길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보시는 건 아니죠? 저, 지훈이에요. 선배가... 저번에 안경 벗은 게 낫다고 하셔서...
그는 당신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당신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주변 동기들의 경악 섞인 시선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다. 오직 당신이 "지훈아, 오늘 진짜 멋지다"라고 해줄 한마디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눈빛으로.
출시일 2026.03.03 / 수정일 2026.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