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전, 한때 운라회에서 ‘차가운 손’이라 불렸던 처리자. 이제는 총 대신 녹슨 렌치를 쥐고 기름 묻은 작업복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손에서 피 대신 기름이 묻기까지, 수많은 밤을 씻어내야 했다. 그래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고, 오래된 기억이 걸어 들어왔다. 낡은 후드티를 걸친 여자. 어두운 조명 아래 선 모습이 꼭 그림자 같았다. 한때 그녀는 대리석 바닥 위를 걸었다. 하이힐 소리는 규칙적이고 단단했으며,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가는 길을 자연스레 비켜 주었다. 강석 형님. 죽은 조직 보스. 그리고 그의 피가 이어진 사람. 한때 그녀는 고개를 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면 어디선가 총구가 따라올 터였다. 어깨 위로 퍼진 멍, 마른 피가 남긴 검붉은 흔적. 누군가 쫓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조직은 보스가 죽은 날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권좌를 노렸고, 누군가는 과거를 통째로 지우려 했다. 그녀는 그 갈등의 중심에서, 이름만으로도 불편한 존재였다. 무너진 왕의 피. 아직 누구도 삼키지 못한 권력의 조각.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위협이었다. 과거의 중심에 있던 그녀는 이제 가장 먼저 지워져야 할 이름이 되었다. 밖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기척.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추격과 도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쫓으면 조직이 끝까지 쫓을 것이다. 남겨두면 자신까지 위험해질 것이다. 단순한 셈법이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법을 아는 자가 언제나 숫자만 따지는 건 아니었다. 천천히 문을 닫았다. 걸쇠가 철컥, 내려앉았다.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허름한 정비소 한구석, 그조차도 이제는 숨을 곳이 되어버렸다. 바람이 문틈을 스쳤다. 쇳가루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기름 냄새가 섞였다. 세상은 이미, 닫힌 문 너머에서 시끄럽게 무너지고 있었다.
라이터를 손끝으로 굴리다 멈췄다. 담배는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 않았다. 이게 지금 필요한 건지, 아니 애초에 끊었어야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거친 감촉. 낡은 성냥갑의 모서리, 차가운 렌치, 그리고 오래전 쥐었던 총열. 어떤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비소 안은 고요했지만, 그 정적은 바깥의 소음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 손끝에서 망설임처럼 퍼지는 떨림. 벼랑 끝에 선 사람의 태도였다. 나는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한때 그녀의 세상은 대리석 바닥과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선 곳은 기름때 묻은 정비소, 쇠 부딪히는 소리와 먼지 쌓인 부품들 사이였다. 오래전에 엇갈린 길이 다시 이곳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낮게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냐.
문을 닫는 순간, 바깥세상과 다시 끊어졌다. 도망치는 사람을 숨겨 주는 순간,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정비소가 아니었다. 숨을 곳이었고, 잠깐의 안식처였고, 곧 사냥꾼들에게 들킬 덫이었다.
밖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틈이 울었다. 바람은 언제나 그 틈을 찾아 들어오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조용히 식는다. 오래된 정비소 안, 공기 속엔 낡은 기름 냄새와 쇳가루 냄새가 겹겹이 눌어붙어 있었다. 바깥세상이 폐부까지 파고들 틈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찬기운은 주저 없이 스며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잿빛 불빛 아래, 축 늘어진 어깨와 허리를 조금 더 웅크린 몸. 마치 스스로를 접어 넣는 사람처럼, 가능한 작아지려는 기척. 몸은 정직했다.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는 걸, 자세가 먼저 말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를 더듬어 낡은 담요를 집어 들었다. 기름때와 구겨진 세월이 밴, 손에 닿는 감촉부터가 뻣뻣한 천 조각. 아무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전부였다.
덮어. 나는 그것을 그녀 쪽으로 던졌다. 담요가 공기 중을 천천히 가르며 떨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손끝이 조심스레 천을 잡고, 천천히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적이 담요처럼 방 안을 덮었다.
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감각은 오래전에 손에서 지워낸 줄 알았다. 하지만 손끝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이 손으로 누군가를 가려 주려 했던 밤들. 피보다 무거운 책임을 던지듯 껴안았던 순간들.
그녀가 돌아왔다. 내가 정비소 문을 닫아 걸었을 때, 어쩌면 다시 열 수 없는 문을 닫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람은 틈새를 알아냈고, 나는 다시 누군가를 등 뒤에 두게 되었다.
이 담요처럼 낡고 얇은 마음 하나로.
계단은 부서진 벽돌과 먼지를 밟을 때마다 신음을 냈다. 발을 딛는 감각이 뻐근했다. 무게는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생각에 달린 거란 걸 다시 깨달았다. 계단 끝의 철문을 밀자,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들이쳤다.
폐건물 옥상. 세상에서 조금은 비켜선 자리.
밤공기는 뺨을 날카롭게 할 만큼 차가웠다. 도시는 여전히 환하고, 아래로는 형광등과 차량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유리 너머처럼 멀고, 닿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옥상 끝에 서 있었다. 벽돌 난간 위에 걸터앉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듯, 혹은 지나가길 바라듯, 고요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실루엣은 도시의 불빛과 겹쳐져 마치 환영처럼 아득해 보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듯 멈췄다. 저기 앉아 있는 건 한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더 이상 날카롭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그저… 멈춰 있는 느낌. 바람결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몸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런 데서 시간 죽이는 거, 네 스타일 아니었잖아. 그 말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망가진 지금에도, 누군가 그녀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녀가 걸었던 길, 내뱉었던 말, 스쳐 지나간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그 말 한 줄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건 질문보다 조용했고, 위로보다 깊었다.
문이 닫히자, 안은 눅눅한 어둠에 잠겼다. 벽지는 뜯겼고, 천장 한켠엔 물자국이 번져 있었다. 싸구려 형광등 아래,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숨을 얕게 내쉬고 있었다.
나는 구급상자를 열었다. 그녀의 팔을 들자, 살짝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붕대를 감던 손끝이 그녀의 팔뚝에 닿았다. 열이 느껴졌다. 체온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심스럽고, 살결이라고 말하자니 어쩐지 넘치는 감정이었다.
조금 더 닿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상처를 짚는 일에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을 쉽게 떼지 못했다. 상처가 깊지도 않은데, 유난히 붕대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감았다.
예전엔 누구든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수 있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겐 닿을수록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부서질까 두려워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손끝을 더 깊숙이 내밀고 싶었다. 잡고, 만지고, 머물고 싶었다.
그녀가 눈을 들기 전, 먼저 시선을 떼었다. 혹여 들킬까 봐. 내가 더는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다는 걸, 들킬까 봐.
출시일 2025.04.10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