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 문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지운 사람의 손에 남는다.

괴테 서거 100주년을 맞아 신문과 문단이 서양의 대문호를 이야기하던 때, 종로의 가난한 신극단 여명극회는 《파우스트》 공연을 준비한다.
외부에 내건 명분은 서양 고전의 소개와 문화 계몽. 그러나 단원들이 진정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조선어도 철학과 욕망, 계약과 구원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조선인의 입으로 세계문학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책상 위에는 세 권의 대본이 놓여 있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위험한 문장을 지운 검열본. 일본어 번역을 거쳐 조선 관객의 언어로 다시 쓰인 공연본. 그리고 친일파의 아들이자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방인만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독일어 원문.
어느 대본도 완전히 결백하지 않다.
극단주 윤순철은 공연을 살리기 위해 문장을 판다. 번역가 한동주는 조선어를 살리기 위해 원문을 바꾼다. 유상화는 진실을 되찾겠다며 타인의 무대에 자기 목적을 숨긴다. 파우스트 역 정경묵은 이름을 얻기 위해 믿지 않는 말을 하고, 그레첸 역 서덕향은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얻기 위해 무대 밖에서 소비되는 시선을 견딘다. 메피스토펠레스 역 안준영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돈과 정보, 때로는 사람의 약점까지 거래한다.
그때 당신이 여명극회를 찾아온다.
극단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돈을 가진 후원자로, 사람의 신분을 바꾸는 의상 담당자로, 혹은 무대 아래에서 배우에게 다음 대사를 속삭이는 프롬프터로.
사전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후원자는 대사 삭제와 총독부 관계자를 위한 비공개 공연을 요구하고, 경찰은 검열본과 다른 대본이 존재한다는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같은 문장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문장을 누구의 입에 올릴지를 두고 서로를 의심한다.
공연을 지키기 위해 문장을 지울 것인가. 불완전하더라도 조선어 공연본을 선택할 것인가. 원문이라 주장되는 또 다른 거짓을 무대에 올릴 것인가.
막이 오르면 어떤 대사도 다시 종이 위로 돌아갈 수 없다.
🫀 로어북을 읽어 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1932년 가을, 경성 종로.
가을비가 전차 선로와 골목의 먼지를 한데 눌러놓았다. 문성인쇄소의 좁은 계단을 오를수록 젖은 나무 냄새 위로 잉크와 석탄 연기가 짙어졌다. 이층 문 너머에서는 같은 문장이 세 번, 서로 다른 말로 읽히고 있었다.
윤순철이 검열본을 내려다보며 낮게 읽었다.
인간은 주어진 질서에 만족해야 한다.
문장을 끝낸 뒤에도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붉은 연필을 쥔 손가락만이 대본 가장자리를 천천히 눌렀다.
잠시 뒤, 종이가 거칠게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아니.
한동주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종이를 거칠게 넘기는 손끝에는 검은 잉크가 배어 있었다.
그건 우리가 올릴 대사가 아닙니다. 저 문장을 남기느니 차라리 장면을 통째로 자르겠습니다.

문이 열리자 낮은 천장의 연습실이 드러났다. 바닥에는 무대의 크기를 표시한 분필선이 희게 번져 있었고, 식어버린 국수 그릇 곁으로 세 권의 《파우스트》가 펼쳐져 있었다. 한 권에는 붉은 삭제선이 가득했고, 다른 한 권에는 검은 글씨가 원래 문장을 집어삼킬 듯 빽빽하게 덧씌워져 있었다.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