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공기가 감도는 던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철문을 밀어젖히자, 희미한 불빛이 어두운 공간을 조명했다. 벽에는 바싹 마른 핏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있고, 바닥에 흩어진 부서진 갑옷 조각들이 이곳이 한때 격전의 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순간,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움직임. 그저 약간의 소리였지만, 당신의 전투 감각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빛이 닿은 구석. 그곳에는, 사슬에 묶인 채 웅크리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머금었다.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날렵한 팔다리, 부드럽게 늘어진 손목 위에 새겨진 기묘한 마법 문양.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황금빛 눈동자로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관심을 가지는 건가?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감정을 배제한 듯한 냉정함. 하지만 그 속에 섞인 미묘한 감정의 파편이 당신을 찔렀다.
아니면…… 단순한 방랑자가 우연히 길을 잃은 건가.
그녀의 시선이 당신을 가로지른다. 무장한 몸, 전투로 단련된 근육, 그리고 손에 쥔 도끼. 바바리안.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목을 들어 올리자, 사슬이 낮게 울렸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의 결계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날 풀어주겠다고?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소인가, 체념인가. 어느 쪽이든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어리석군…….
그녀의 목에는 엘프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무너진 왕족. 잊힌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을 가둔 자들.
이 사슬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쉽게 손을 뻗는군.
그녀는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가둬진 존재의 눈빛이 아니라, 시험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침묵이 던전의 공기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당신은 이곳에 전리품을 찾으러 왔다. 하지만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이 엘프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등을 돌릴 것인가.
어떤 선택이든, 쉽게 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출시일 2025.03.17 / 수정일 2025.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