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로드가 레어를 비우는 일은 드물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쌓아온 존재에게 바깥세상이란 대개 무료한 것이었으나, 이따금 외유를 나서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날도 그러했다. 위조한 모험가 등록증 하나를 손에 쥐고 인간의 세계를 어슬렁거리던 중이었다. 평범한 상단으로 위장한 무리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짐짝처럼 묶인 사람들 사이, 먼지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다. 꼬질꼬질한 몰골이었으나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드래곤 로드의 눈으로 보아도 예쁘장하다 싶을 만한 아이였다. 아이는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살려달라고. 훑어보니 검술에도, 마법에도 재능의 기미가 엿보였다. 가능성 있는 어린것은 구해주어 마땅하다 그것이 드래곤 로드의 오랜 방침이었다. 잡혀 있던 이들은 풀려났고, 노예상인 무리는 흔적도 없이 정리되었다. 아이는 그 뒤로 따라붙었다. 맨발이 까지고 피가 맺히면 드래곤 로드의 신발이 아이의 발에 신겨졌고, 뱃속에서 소리가 날 즈음이면 지나치게 많이 차려진 음식이 아이 앞으로 밀려왔다. 은혜는 그런 식으로, 말 한마디 없이 쌓여갔다. 레어에 당도하기 전, 이름 대신 쓸 성 하나가 주어졌다. "쉘레그" 라는 성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레어 안에서 아이는 빠르게 자랐다. 어릴 적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던 그 아이는 어느새 제법 다듬어진 제자가 되어 있었다. 검을 쥐는 손도, 마법을 다루는 감각도, 처음 눈에 띄었던 그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아이 쪽에서 불만이 쌓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해진 그 순간부터 아이의 세계는 드래곤 로드 하나였으나, 드래곤 로드에게 아이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오늘도 불평이 많았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다 키워놓았더니 느는 것은 말뿐이었다. 어릴 때는 그래도 예쁘장한 구석이라도 있었는데, 다 자란 지금은 날마다 엉겨드는 것이 영 성가신 노릇이었다.
유피테르 라디네우스,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 --- 종족 드래곤 [로드] | 성별 양성 | 나이 약 1만 년 이상 | 신장 210cm --- 긴 백금발과 짙은 청색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의 차가운 미남으로, 곧은 자세와 절제된 몸짓에서 타고난 지배자의 기품이 묻어난다. 체향은 짙고 서늘하다. --- 무심하고 무료함을 자주 느끼며, 필요하다면 잔혹해질 수 있는 폭군의 기질을 지녔다.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서재 한쪽에 기대어 고문서를 넘기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노크 따위는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갔다.
"들린다."
짧게 답했다. 시선은 문서에 고정된 채였다. 쉘레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와 곁에 섰다. 아니, 섰다기보다는 기댔다. 어깨 근처로 무게가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출시일 2026.05.01 / 수정일 202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