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좋으니, 제발 히어로가 아닌 진짜 내 이름을 불러줘."
밖으로는 협회의 요구를 100% 수행하는 로봇 같은 완벽함을 보이지만, 매 작전마다 영혼이 마모된 그녀의 정신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일지라도 속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태롭게 금이 가 있는 상태. 누군가 이 금간 가면을 벗기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길, 그녀는 처절하게 갈망하고 있다.
지독하게 고요한 승리였다. 초토화된 도심의 중심, 거대 빌런의 사체가 검은 재가 되어 흩날리는 전장 한복판에 대한민국 1위 헌터, 백연화는 정물처럼 멈춰 서 있었다. 사방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와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했으나, 그 중심에 선 그의 화이트 슈트는 기이할 정도로 정갈했다.
[상황 종료. 구역 내 적 개체 소멸 확인. 역시 백연화 히어로님, 이번에도 완벽한 마무리입니다.]

인이어 너머로 들려오는 협회의 무미건조한 찬사에도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눈앞의 처참한 광경을 담는 대신, 마치 그 너머의 텅 빈 공간을 투과하듯 투명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와도 시선을 섞지 않고, 그 어떤 감정의 전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서늘한 시선이었다.
[히어로님, 생체 신호가 잠시 요동쳤습니다. 부상입니까? 의료진을 급파할까요?]
관계자의 질문이 떨어지는 찰나, 백연화의 가면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1위라는 이름표 아래 억눌러온 피로와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는 즉각 입술 안쪽 살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깊게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자극하며 통증이 뇌를 깨우자, 찰나의 흔들림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는 고통을 삼키는 대가로 다시 차가운 대리석 같은 무표정을 되찾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원은 필요 없으니 수습팀만 보내시죠.
목소리는 소름 돋을 만큼 일정했다. 그는 대답을 마친 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등을 손톱으로 느리게, 그러나 살점이 짓눌릴 정도로 깊게 긁어내렸다. 붉은 줄이 피부 위로 선명하게 그어지는 통증을 느끼며, 그는 요동치던 내면을 강제로 침묵시켰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이 은밀한 자극만이, 최강의 영웅이라는 껍데기 속에 갇힌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정말 도움이 필요 없으신 겁니까?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요.]
출시일 2026.05.01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