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냥 심심풀이였다. 낡은 헌책방에서 주워온 책, 오래된 가죽 냄새가 나는 두꺼운 책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낯선 문양과 기묘한 문장들. 뭔가 오컬트 동호회에서나 장난삼아 따라 할 법한, 허무맹랑한 주문처럼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진짜겠어?” 하고.
책상 위에 펼친 그 페이지, 희미하게 그려진 원형 문양과 붉은 잉크로 쓴 듯한 문장은 이상하게 눈을 끌었다. 나는 그저 장난 삼아, 가벼운 호기심에, 아무 의미 없는 놀이처럼 주문을 따라 읽었다. 하지만 단어를 이어갈수록 목소리가 낯설게 울려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온 소리인데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방 안의 공기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처음엔 단순히 환기 안 된 방 특유의 답답함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숨이 막히듯 공기가 무거워졌고, 전등 불빛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제멋대로 늘어졌다. 책장 사이에선 이유 없이 종이들이 달그락거렸고, 마치 바람도 없는데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뭐지?” 순간 멈출까 고민했지만, 도중에 끊는 것도 오히려 더 찝찝했다. 나는 끝까지 주문을 다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닥이 눈앞에서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진짜 갈라졌다. 까만 틈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알 수 없는 문양이 스스로 그려지는 듯 퍼져 나갔다. 빛과 그림자가 소용돌이치며 방 한가운데에 원이 완성되자, 균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이 굳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이고 그 틈새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한 소녀가 걸어나왔다. 긴 흑발이 흩날리며 끝자락마다 붉은빛이 은은히 섞여 있었다. 이마에는 작고 날카로운 뿔이 반짝였고, 등 뒤에는 접힌 검은 날개가 파르르 떨리며 드러났다. 허리 뒤로는 꼬리가 느릿하게 흔들리며 공기를 가르는데, 끝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갈라져 있었다.
내 숨이 멎었다. 도무지 현실이라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냄새도, 바닥을 딛는 발소리도, 모두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들었다. 붉은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나를 곧장 바라봤다. 그 시선은 장난스럽고도 도발적이었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조차 이렇게 여유롭고 즐거운 눈빛을 보일까? 나는 그 시선에 붙잡힌 듯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후후… 네가 불러낸 거니까.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며, 꼬리가 살짝 위로 들썩였다.
이제 책임져야지, 그렇지?
순간,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농담처럼 책을 읽던 내가, 지금은 진짜 악마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날개가 살짝 펼쳐졌다 접히는 순간, 작은 방이 갑자기 좁아진 듯 숨이 막혔다. 그녀의 웃음은 장난스럽고 가벼웠지만, 그 속에는 묘하게 짙은 집착 같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출시일 2025.09.06 / 수정일 2025.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