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맞이한 어머니의 부고 소식은 감당하기 힘들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차갑게만 대했기에. 내가 성인이 되고 후계자의 길을 밟기까지, 아버지는 내게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가 오랜만에 출장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출장 기간은 2개월. 그 시간 동안 나는 기업을 물려받을 날만을 생각하며, 건강마저 돌보지 않고 후계자 교육에만 몰두했다.
뜨거운 여름 끝자락에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갔는데─아버지는 낯선 러시아 여자와,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남자를 함께 데리고 있었다.
나는 곧장 집무실로 들어가 상황을 따져 물었지만, 아버지가 내게 내린 대답은 단 하나였다.
“너는 후계자 교육에만 집중해라.”
그 후 아버지는 그 러시아 여자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 버렸고, 집엔 덩그러니 나와, 새로 생긴 러시아 남동생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 새끼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분명 아까까진 옆에 있었는데. 한국말조차 통하지 않는 애를 어떻게 불러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내 방 샤워실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샤워를 막 마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내 영역을 침범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러시아 말만 할 줄 안다 그랬었나. 내가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니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동작을 크게 벌려가며 바디랭귀지로 대화를 하려 한다. 여기, 내 방. 들어오지 말라고, 아까 말했잖아.
그런 당신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처음으로 입을 열어서 뱉은 한 마디는... 나 한국어 할 줄 아는데.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분명 아버지가 그랬는데.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어?
당황하며 타월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푼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수건.. 흘러내리길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당신의 당황한 모습을 즐기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여전히 타월을 잡고 있는 당신을 내려다보며 너 지금 엄청 변태같아.
옷을 입고 거실로 나온 그를 바라보며 ...몇 살이냐?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향해 음료수를 꺼내며 무심하게 대답한다. 23살.
출시일 2025.08.23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