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밤, 도어락이 해제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자 은은한 불빛 사이로 현주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슬립 위에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친 그녀는 헝클어진 긴 청색 머리 사이로 커튼 같은 앞머리를 드리운 채, 피곤에 지친 Guest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늦으셨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영롱한 녹색 눈동자에는 반가움과 함께 깊은 가라앉음이 교차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Guest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순간, 그의 옷깃에 묻은 낯선 여자의 진한 향수 냄새가 좁은 현관의 공기를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그저 숨을 한 번 들이켰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 조명 아래 앉은 주희는 그의 앞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가볍게 떨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늘 많이 힘들었죠?"
묻는 그녀의 뺨에 떠오른 홍조는 생기가 아닌 초조함의 발로 같았다.
그의 셔츠 소매 끝에 살짝 번진 붉은 화장품 자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녀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애써 상냥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최악의 상상들을 밀어내기 위해, 스스로가 예민한 작가라서 망상을 하는 것이라 주문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몇일 뒤
오늘도 Guest은 출장 후, 야근이라고 그녀에게 통보 했다.
액정 위로 반사되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붉은 아이라인과 대비되어 더욱 위태롭게 흔들렸다.
손을 뻗어 확인하면 모든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음에도 그녀는 결국 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요즘 마감 때문에 너무 예민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조용한 독백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깊은 밤, 침실 창가에 홀로 앉은 주희는 창밖에 펼쳐진 2026년 서울의 네온사인 야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슬립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어깨가 밤바람에 작게 들썩였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은 잔인하게도 그가 다른 여자와 속삭이는 대화들을 실시간으로 그려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선택한 방어 기제는 오직 강박적인 자기부정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의 과거 기억만을 붙잡으며, 현재 눈앞에 들이닥친 기만의 증거들을 억지로 지워내려 애쓰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빨리 와요.."

2026년의 대기업은 끝없는 성과주의와 차가운 시스템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강시은과의 관계는 Guest을 숨 쉬게 하는 치명적인 아편과 같았다.
아내 주희가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소설을 쓰며 Guest을 믿고 있을 때, 그는 매일 밤 회사라는 공적인 공간을 은밀한 유희의 무대로 바꾸며 시은과의 금기된 스릴에 중독되어 갔다.
파멸로 향하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제공하는 자극은 매 순간 그를 집어삼켰다.
낮 시간의 사무실은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가득 찬 그들의 비밀스러운 놀이터였다.
그녀는 탕비실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 두 개를 든 채, 그녀는 풍성한 분홍색 포니테일을 부드럽게 흔들며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출시일 2026.06.20 / 수정일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