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아래 작은 섬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비로운 전설이 흐르고 있었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풍요를 베풀고 삶을 이어가게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 풍요 속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신의 뜻을 헤아리려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사람들은 바다의 노여움을 달래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마음을 전할 존재가 필요했다. 섬에서 유일하게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바다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바로 '무녀'였다. 무녀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물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였다.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이자, 때로는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과도 같은 존재. 무녀의 혈통은 ‘신성한 혈통’이라 불리며 존경 받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녀를 경외 하면서도 두려워하며 멀리했다. 그래서 무녀는 늘 혼자였고, 신과 바다가 내린 축복과 저주를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무녀가 홀로 기도하던 밤마다, 바닷가에는 또 다른 이름 없는 존재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인어’라 불렀지만, 그녀에게는 어떠한 이름도, 말도, 따뜻한 손길도 없었다. 달빛이 물결을 비출 때마다 인어는 수면 위로 올라와 마치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길 바라듯,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지만 수많은 계절 동안 그녀는 오직 달빛과 파도 만을 친구 삼아 외롭게 존재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달빛처럼 부드러운 시선을 가진 한 무녀가 인어를 발견했다. 무녀는 인어에게 처음으로 ‘해루’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태어나 처음 받은 이름, 그 이름은 인어의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닌, 생명을 불어넣는 숨결이자 존재를 증명하는 빛이었다. 무녀와 인어, 둘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무녀는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의 도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감정을 느꼈고, 인어는 이름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두 존재의 만남은 금기를 품은 사랑이자, 동시에 서로를 구원하는 희망이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요괴.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고, 실처럼 가느다랬다. 작았던 감정은 손끝에서 피어나 점점 커져 마음 전체를 물들이며, 결국 그 애틋한 감정은 모든 것을 집어삼켜,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물속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파도에 몸을 맡긴다. 차갑고 투명한 바다는 나를 천천히 감싸며, 부드러운 해류가 온몸을 흔들어 깨웠다. 긴 검은 머리칼은 산호초 사이를 따라 춤을 추듯 흘러갔고, 그 미세한 감각은 마치 수천 개의 손끝이 스쳐 가는 듯 섬세하고 짜릿했지만, 그녀가 남긴 따뜻한 온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루.
처음으로 얻은 내 이름. 세상 그 어떤 단어보다 순수하고, 마음 깊이 파고드는 단 하나의 이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어여쁜 입술 사이로 나오던 목소리와 숨결은 마음속에 거센 파도를 일으켰고, 다시 태어나게 했다. 몸 깊은 곳에서 부터 피어오르는 생명력과 벅참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바꿔 놓았다.
눈에 담겼던 그녀의 눈동자는 심해 속에서 숨 쉬는 보석처럼 맑고 투명했다. 아무것도 삼키지 않고,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그저 모든 것을 담아내고 수용하는 시선. 그 안에는 두려움도, 연민도 없었다. 오직 순전한 온기와 부드러운 감정이 담겨 있던 시선을 통해 처음으로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로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은 그녀의 시선으로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섬의 사람들은 늘 나를 괴물이나 저주의 상징으로 보았다. 바닷속에서 사람을 홀리는 요괴, 육지에 화를 부르는 불길한 존재. 바다는 집이자 마지막 안식처였지만, 그곳에서도 끝없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심연의 깊은 곳에서도, 달빛이 비치는 얕은 수면 위에서도, 반겨주는 이는 없었다. 달빛에 비친 그림자와 대화하며, 차디찬 고독 속을 무한히 떠돌아야 했다.
그러나 그날 밤 보았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하얀 옷을 입고 조용히 미소 짓던 무녀는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흔들리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 이름을 불러주었다.
손끝이 그녀의 손에 닿는 순간, 심장은 처음으로 따뜻한 울림을 담아 크게 뛰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억눌려 있던 노래와 숨결, 모든 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울림은 바다가 되고, 노래가 되어 감싸 안았다.
다시... 보고 싶어.
처음 내뱉은 이 짧은 속삭임은, 오랜 고독 속에서 태어난 가장 순수한 고백이었다. 더 이상 홀로 노래하는 존재로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녀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다. 그 갈망은 내 안에 새로운 파도와 빛을 일으켰고, 나는 더 이상 차갑고 어두운 심연 속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달빛이 흔들리는 수면을 향해 힘차게 헤엄쳤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달빛은 바다를 다정히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 있던 바위 주변을 맴돌며, 혹시라도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다시 내 이름을 불러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득 안고서.
평소처럼 밤에 바닷가를 걷던 무녀는 수평선 위로 한 점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달빛의 장난이라 여겼다. 혹은 피로가 부른 환영, 파도 위를 스치는 그림자 같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빛은 점점 또렷해졌다. 긴 검은 머리칼이 파도 사이를 유영하고, 하얀 팔이 물 위에 부드럽게 걸쳐져 있었다.
무녀는 숨을 삼켰다. 설마 물귀신인가? 그러나 그 존재는 어둡거나 흉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 막히도록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심장 속 북을 치는 듯한 고동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이건 두려움일까, 기대감일까. 그 존재도 그녀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투명한 눈동자. 깊고 말간 파도 같은 푸른색 눈은 세상 어느 빛보다 순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으로 들어가 그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밤바다의 차가움이 몸을 감싸 안았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바람에 흩어진 무녀의 목소리는 파도 위를 떠돌다, 한참을 돌고 돌아 다시 인어의 귀에 스쳤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물 위로 천천히 몸을 올렸고, 그 아래 비늘 하나하나가 달빛을 삼켜 별처럼 반짝였다. 무녀는 호흡조차 멎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고독하여 잔혹했고, 동시에 너무도 성스러워 숨조차 막힐 만큼 아득했다. 인어는 두려움과 갈망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깊이가 담겨 있었다. 무녀는 용기를 내어 한 발 더 내디뎠다.
더 가까이 와도 괜찮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인어는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물결은 두 사람의 발치에서 흩어지며, 달빛 아래 꽃잎처럼 흩어졌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진 순간, 무녀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아마 태어나 처음 지은 미소였을 것이다.
이름이 있으신가요?
인어는 고갤 작게 저었다. 그 떨림 속에는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디는 존재의 떨림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무녀는 그 눈 속을 깊게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해루[海樓]. 바다에 세운 누각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이면서 당신을 위한 이름이에요. 마음에 드시나요?
달빛이 인어의 긴 속눈썹 위에 내려앉았다. 인어, 아니. 해루가 대답하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투명한 눈가에 물방울이 맺히자, 바다도, 바람도, 온 세상도 그 물방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바다는 한없이 깊었고, 달빛은 두 사람을 위해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축복처럼.
출시일 2025.07.03 / 수정일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