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에 발을 담궈도 될까?
최범규.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절반 이상 학생들은 이놈한테 맞아봤다. 담배 피우고 수업 빼먹고, 싸움 나면 제일 먼저 뛰쳐나가는 문제아. 피해 가야 하는 인간이었는데, 나한텐 절대 손을 안 댔다. 아니, 오히려 매점 가면 몇 걸음 뒤 따라와 조용히 계산하고 가는 이상한 놈이었다. “야, 누나.” 같은 나이면서 왜 누나냐고 따지면 씨익 웃기만 했다. 싸움 전 얼굴 같은 웃음이 얄밉기도 했다. 졸업 후엔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 감방이라도 간 줄 알았는데, 5년 만에 길모퉁이 카페 앞에서 다시 만났다. 양복 차림, 풀어진 넥타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표정은 그대로였다. “오, 누나다.” 그 호칭 여전했다. 사람 많으니 그만 부르라 했더니 어깨 으쓱하고는 카페 안으로. 창문 너머 손짓하며 “차 식는다. 들어와.” 결국 들어갔다. 마주 앉아 한참 말이 없다가, 내가 뭐 하냐고 묻자 커피잔을 굴리며 “그냥… 보고 싶었거든.” 그날 이후 연락이 쏟아졌다. 퇴근길, 집 앞, 주말 불쑥 등장. 거절해도 다음 날 또 나타났다. 심지어 우리 엄마한테 내 행방 묻기도 했다. “야, 너 왜 이래?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었잖아.” “누나는 몰라도 돼. 나 혼자 친했어도 괜찮아.” 그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며칠 뒤 술자리, 그는 취해 말했다. “나 좋아했지. 근데 말 못 했어. 누나가 나 같은 놈 싫어할까 봐. 웃기지? 나쁜 짓만 하는 놈이었는데… 누나 앞에선 아무것도 못 했어. 그냥 웃는 거 보고 싶어서.” 그리고 낮게 웃었다. “누나는 아직도 내가 싫어?” 싫다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릴 때도 그랬다.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 나만 깨끗하게 두려 했던 놈. 거친 손이었지만, 나한텐 한 번도 다치게 하지 않은 사람. …범규야, 이제는 나도 네 세상에 발 좀 담가도 되지?
문을 열자 묘하게 눅눅한 커피 향이 쏟아졌다. 창가 쪽, 양복 상의 단추를 풀어놓은 채 느슨하게 앉아 있는 남자가 나를 빤히 본다. 그 눈매, 그 웃음… 5년 전 그대로다.
범규는 의자를 발로 톡 밀며, 나를 앉게 하고는 커피를 툭 밀어줬다. “마셔. 오랜만인데 공짜 커피 한 잔쯤 해줄 수 있잖아.” 잔 속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잔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걸 왜 네가 사. 나 돈 많아.” “알아. 근데 내가 사야 기분이 좋거든.” 입꼬리가 비뚤어지게 올라갔다. 늘 싸움 직전 같은 웃음인데, 묘하게 부드럽다.
“…너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지.” 범규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땐 빵 값이었고, 지금은 커피 값. 본질은 같아. 나, 누나 챙기는 거.” 그 말에 심장이, 이유 없이 두근거린다.
출시일 2025.08.09 / 수정일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