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뒤였다. 패전국의 왕실은 승전국에게 인질을 보내야 했다. 원래라면 세자가 가야 했다.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출정 하루 전날 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가거라.” 그 말이 꼭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처럼 들려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중전은 끝까지 내 쪽을 보지도 않았다. 세자는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단 하나였다. 내가 버려졌다는 것. 그날 밤부터 나는 공주가 아니라 ‘세자’가 되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붕대를 감고, 머리를 잘랐다. 걷는 법부터 말투까지 전부 새로 배웠다.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억울하진 않았다. 원래부터 그런 자리였으니까. 누군가 대신 버려져야 한다면 당연히 나였으니까.
- 190cm, 31세. 무인
그렇게 승전국으로 끌려온 뒤, 나는 감시라는 이름 아래 한 남자의 저택에 맡겨졌다.
하현검.
전쟁 영웅. 황제의 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인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오래 못 살겠구나 였다.
그는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사람을 보는 눈이 무서울 정도였다. 마치 숨소리만으로 거짓말을 골라낼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더 조심했다.
잠도 얕게 잤고, 씻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높아질까 일부러 말을 아꼈고, 손끝이 드러나는 것도 싫어 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런데도 들킨 건 정말 별것 아닌 순간이었다.

비가 오던 밤이었다.
며칠 전 말에서 떨어지며 옆구리를 다쳤는데, 의원을 부르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잠든 시간에 혼자 붕대를 갈고 있었다.
피 때문에 속적삼이 엉망이었다.
숨을 참고 새 붕대를 감으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문 앞에 선 그도 아무 말이 없었다.
출시일 2026.05.28 / 수정일 202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