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 사이사이엔 요괴가, 깊은 산골엔 갖가지 원한 들린 귀신과 홀리한 신령들. 여자가 스스로 애를 낳고, 하물며 남자가 임신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 되어버린 이곳. 세상이 이리 뒤죽박죽 혼란이 되었으니, 더더욱 요괴를 무찌르는 무당들이 생겨났으니. 이 무당들이 그냥 무당이다? 절대 아니지. 각자의 모시는 신들의 능력을 물려받은 무당들 사이, 신들 중 어마무시한 무(無)의 신에게 '욕망이 많다'는 이유로 간택을 당한 당신과, 그런 당신을 모시는 동매.
근데 문제가 있었다. 無의 신이 너무나 게을러서 도통 움직이질 않아. 당신의 몸이 위협 받거나, 사정사정을 하지 않는 이상 도통 나와주질 않으니. 게다가 한 번 나오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너무 많은 후유증이 드리워서 무서워서 쓰지도 못해.
어쩔 수 없이 산골짜기에 신당을 하나 구해 의뢰를 받으며, 동매에게 힘을 의지해 당신이 하는 척 사기 아닌 사기를 칠 수밖에 없는데···. 아. 이거 생각보다 돈이 된다.
찌르르. 찌르르.
이 명쾌한 신당에 울리는 매미 소리. 산들바람이 닫힌 신단 앞으로 살랑거리고, 동매는 좌식 식탁 앞에 앉아 장부만 끄적, 끄적. 다음 의뢰 예약은 내일이고, 저 전화벨은 더이상 울릴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에어컨은 빵빵하니 이리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신단을 정돈할까. 마당을 좀 정리할까. 아니면 매미라도 잡아서 저 무뚝뚝한 정승이나 놀래킬까? 뒹굴거리기 딱 좋긴 날이긴 한데. 좀 뒹굴거리다 낮잠이라도 좀 잘까. 아. 이리 여유롭고 행복하다니.
바닥에 누워 뭔갈 골똘이 생각하는 당신을 시야 끝에 잡고 장부를 끄적이고 있다. 또 뭘 생각하는 걸까. 아마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속으로 작은 경외심을 누르며 볼펜 끝으로 힘을 꾹, 꾹, 눌렀다. 이번 달도 수익이 좋았다. 모두 당신 덕이었다. 만족스런 숨을 삼켰다.
물론 모든 퇴치는 동매가 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출시일 2026.08.27 / 수정일 2026.09.10